|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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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문씨 중에는 역사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하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포상하는 국가 보훈처 독립유공자 포상록에 수록된 남평문씨 애국지사는 155명(2024년 8월 19일 현재)에 달합니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으며 애국지사 성명을 클릭하면 공훈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대종회에서는 2019년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문중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선양대회를 갖었습니다. ![]()
2023 - 2024년 추가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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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대종회가 주관하는 "3.1절 제100주년 기념 및 남평문씨 독립유공자 선양대회"가
2019년 3월 1일(금) 10시 명동 밀리오레 빌딩18층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선양식에는 문상주 대종회장, 문영일 명예회장,문정일 서울종친회장, 문용현 통일그룹회장 등
많은 종친들이 참석하여 문윤국, 문창범, 문양목 선조의 약력을 소개하고
그 외에 121명에 달하는 문중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행사를 성대히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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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수(泰洙) 1880 – 1913
❏ 항일 의병대장
❏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1999년 1월의 인물로 선정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문태서(泰瑞) - 족보상 이름은 태진(泰珍), 독립유공자에는 태수(泰洙)로 되어 있음,
1880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병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기적비(紀蹟碑):함양군 안의면 광풍루에 1970년 건립,
신석호(국사편찬위원장)씨 비문지음
순국비(1908 일군 헌병을 격파한 무주군 설천면 상공리 인월담의 정수장 옆)
전적비(거창 계북면 양악리) 문태서 비석(함양읍 상림숲 인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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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상익(相翊) 1893 – 1960
❏ 애국지사 -3.1운동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송산면의 서기로 3월 26일부터 동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천여 명의 군중이 송산면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러자 일경은 주동자 홍면 외에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면이 갑자기 일어서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은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이에 야구광삼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며 홍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
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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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일민(一民) 1894 – 미상
❏ 애국지사 - 평남도청 투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복군총영(總營)에서는 일제기관 폭파,
일제요인 암살 등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자는 방침 아래 특공대를 국내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장덕진(張德鎭) 박태열(朴泰烈)
우덕선(禹德善) 김예진(金禮鎭) 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제2대에 편성되어 평양에 특파되었다.
입국 도중 평남 안주 입석(安州 立石)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에 들어와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후 피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일행 중 여자인 안경신은 피신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았으며,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1921년 9월 삼육대학(三育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24년에는 운남(雲南) 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3월 13일에는 곽 헌(郭憲) 최석순(崔錫淳) 강창제(姜昌濟)
나창헌(羅昌憲)과 "이승만탄핵결의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교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에는 상해로 돌아 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5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승인되었고,
그후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김 철(金徹) 박창세(朴昌世) 이 웅(李雄=李俊植)
왕 웅(王雄=金弘壹)과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군인회간장(軍人會簡章)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가입하여
신언준(申彦俊) 임득산(林得山) 등과 제1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유동열(柳東說)과 중령(中領)을 대표한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이후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홍서(金弘 )와 같이 교민단(僑民團)재건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박창세,
신공제와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유동열 총장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조국의 광복시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동분서주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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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숙(昌淑) 1898 – 1928
❏ 애국지사 -참의부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황해도 신계(新溪) 사람이다.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여,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병졸 17명을 이끌고
봉천성 즙안현(奉天省輯安縣)에 주둔하여 활동 중, 부하들에게 밀정 홍종흡(洪宗洽)을 사살하도록 하였다.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江界) 지방에서 군자금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1928년 3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살인교사·가택침입·강도미수·공갈살인이란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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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학(昌學) 1882 – 1923
❏ 애국지사 -대한군정서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함북 온성(穩城)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1921년 2월 2일에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김학섭(金學燮) 인솔하에
소총 10정, 탄약 150발, 폭탄 2개씩을 가지고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연말연시중 일군경의
특별경계가 심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고 신건원(新乾源)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동년 2월 5일 오후 8시 화룡현(和龍縣)을 떠나 밤이 깊기를 기다려 오전 1시에 그곳의 지리에 밝은 그가
먼저 도착하여 불빛으로 신호하는 것을 목표로 일제히 사격을 시작,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을
사살하고 숙고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에 폭탄 2개를 투척하고 일군경과 교전후 피신하였다.
그후 만주 혼춘(琿春)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 등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김학섭(金學燮) 등과 함께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김학섭 이하 13명은 1923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동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김학섭과 그의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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