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남평문씨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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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범

문태수

문상익

문석봉

문양목

문일민

문일평

문창숙

문창학

문윤국

선양대회사진

남평문씨 중에는 역사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하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포상하는 국가 보훈처 독립유공자 포상록에 수록된 남평문씨 애국지사는 155명(2024년 8월 19일 현재)에 달합니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으며 애국지사 성명을 클릭하면 공훈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대종회에서는 2019년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문중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선양대회를 갖었습니다.

** 아래의 유공자 성명을 클릭하면 인물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
2023 - 2024년 추가된 분


3.1절 100주년 기념 및 남평문씨 독립유공자 선양대회

남평문씨대종회가 주관하는 "3.1절 제100주년 기념 및 남평문씨 독립유공자 선양대회"가
2019년 3월 1일(금) 10시 명동 밀리오레 빌딩18층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선양식에는 문상주 대종회장, 문영일 명예회장,문정일 서울종친회장, 문용현 통일그룹회장 등
많은 종친들이 참석하여 문윤국, 문창범, 문양목 선조의 약력을 소개하고
그 외에 121명에 달하는 문중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행사를 성대히 가졌습니다































독립운동가 문창범



❏ 문창범(昌範) 1870- 1934
❏ 상해 임시정부 국민의회 대표, 초대 교통총장
❏ 애국지사 – 만주지역 독립투쟁
❏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1877년경 부친을 따라서 노령(露領)으로 망명한 뒤 1908년 노령 니콜리스크의 
      타레스부락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위하여 
      이 학교를 1916년에 이르기까지 운영하였다.
1911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배일선전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발송하고 국권회복을 기도하면서 
         국내에 무력진공을 계획하는 한편 노령과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쌍성(雙城)에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선임되어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자치기관으로 육성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 동삼성과 노령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독립국가임을 천명할 때 서명자 3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노령지방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나갔다. 동년 3월 17일 국내에서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서를 대한국민의회장의 명의로 작성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에 있는 일제 영사관으로 송부하여 일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는 한편 기타 11개국 외국영사관에 배부하며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도록 자동차 여러 대에 나누어 승차한 뒤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는 그곳에 망명하여 있던 독립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3·1독립운동 정신의 결집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상해에 수립하고 이승만(李承晩)을 國務總理로 하여 내각을 조직할 때 그는 교통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23일에는 국내 13도 대표 이만직(李晩稙)외 23명이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어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내각조직으로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國務總理에 이동휘(李東輝)가 선임되었는데 문창범은 교통부총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각 단체 각 당파를 총망라하여 대통령제로 조직을 개편할 때 그는 다시 교통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동년 4월 대한국민의회를 해삼위에서 무시(武市)로 이전한 뒤 흑룡강주(黑龍江州)에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본부를 설치하여 러시아 공산당 정부의 원조를 받아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자유보(自由報)〉〈신세계(新世界)〉등 홍보물을 발행하면서 독립운동 대표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조국독립을 성취하고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2월 22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연추(煙秋) 지부의 책임을 담당하여 중국 동삼성 및 노령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치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노령내에 거주하는 귀화한 교민들에게 입교를 권유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동년 6월 독립군의 청산리(靑山里) 전쟁 후 노령 하바로브스크 소재 소련 공산군 제2군단과 교섭하여 간도지역 독립군의 노령 자유시(自由市)로의 이주를 성사시켰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인 1922년 6월에는 노령 무시(武市)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이동휘와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소집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가,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10월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독살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문태수


❏ 문태수(泰洙) 1880 – 1913
❏ 항일 의병대장
❏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1999년 1월의 인물로 선정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문태서(泰瑞) - 족보상 이름은 태진(泰珍), 독립유공자에는 태수(泰洙)로 되어 있음,

1880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병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기적비(紀蹟碑):함양군 안의면 광풍루에 1970년 건립,
              신석호(국사편찬위원장)씨 비문지음
순국비(1908 일군 헌병을 격파한 무주군 설천면 상공리 인월담의 정수장 옆)
전적비(거창 계북면 양악리) 문태서 비석(함양읍 상림숲 인물공원)>
아래 내역은 문태서 관련 참고 사진입니다


독립운동가 문상익


❏ 문상익(相翊) 1893 – 1960
❏ 애국지사 -3.1운동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송산면의 서기로 3월 26일부터 동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천여 명의 군중이 송산면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러자 일경은 주동자 홍면 외에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면이 갑자기 일어서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은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이에 야구광삼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며 홍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
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문양목



❏ 문양목(讓穆)  1869 -1940
❏ 애국지사-미국지역독립운동
❏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충남 태안 출신
공은 재미 독립운동가로서 1869년(고종6년) 12월23일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 268번지에서 부 상도(常道)공과 모 순흥 안씨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하시니 충선공 휘 익점(益漸) 선조님의 18대 손으로 
자는 승렬(承烈) 호는 우운(憂雲) 휘는 양목(讓穆) 이시다.
 공은 1894년 갑오 동학농민 혁명군으로 수많은 전투에 적극 가담했으나 혁명실패로 체포 
 구금되어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구사일생 극적 탈출하여 인천으로 피신하시다.
 공은 1905년 하와이 사탕 수수농장 노동자로 이민 망명하심을 기반으로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던바 대동보국회를 결성 중앙회장으로 활동하심을 비롯.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 대동신서관 사장, 신한민보 주필 등을 
 역임하시면서 한인군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해외독립군 기지개척(만주, 시베리아) 등의 
 군인 양성을 적극 지원하셨고, 
 이승만의 “독립정신(獨立精神)”, 박용만의 “국민개병설(國民皆兵設)”과 “군인수지(軍人須知)”를 
 간행 보급하는 등 미국 교민의 권익증진 일제 침략규탄 구국의지의 애국정신 민족정기의 
 국가관 고취에 불철주야 헌신하시다.
  특히 1908년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대한침략을 공식적으로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므로 이에 전명운 장인환 의사(義士)가 살해 처단하였는바 공은 시종일관 
  이 거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시다. 
  이는 곧 우리 독립역사상 해외 그것도 미국에서의 첫 무력 독립 쟁취사건으로 한민족 독립정신과 
  정의감을 세계 만방에 떨치는 의열투쟁(義烈鬪爭)의 효시가 되다.
  따라서 공은 동학에 심취하여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유림선비로 항쟁에 투신한 선각자였고, 
  망명 이후 수많은 논설과 기고를 통하여 동포들이 대동단결하도록 강력한 항일 독립투쟁 문필을 
  휘날린 위대한 언론인이었으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고 밀어주고 앞장선 
  실천적 교육자 영도자 개척자로써 조국 광복을 위하여 평생 몸 바치신 더할 나위없는 
  재미 독립운동가 이시다.
  그라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망국의 통한을 가슴속 깊이 품으신 채 1940년 12월 25일 
  71세를 일기로 멀리 타국에서 서거하시니 오호통재(嗚呼通哉)하는  수 많은 재미동포들 애도 
  속에 유택(幽宅) 샌프란시스코 스톡턴 파크뷰 공동묘지에 끝내 안장되어 영면하시다.
  그 후 정부는 광복 50년 경과된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제726호)을 추서하였고 
  2010년 생가지(生家地)를 충남도 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2015년 향리(鄕里)의 기념사업회에서는 
  사당 충운사(忠雲祠)를 건립하여 매년 추모제를 거행, 공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공은 슬하에 3남2녀를 두셨는데 24세에 김해 김씨와 혼인하여 첫딸 필원(弼元)이 출생하였는바 동학란 실패로 숨어 살던 고생 극심 탓으로 부인이 사망하므로 여식(女息) 필원은 우성 박용만(又醒 朴容萬)의 노모 댁에서 양육되다가 양부(養父) 금하 신흥우(錦霞 申興雨)의 배려로 인천 영화보통학교에 이어 이화학당 졸업 후 이수석(李秀石)과 혼인하였다. 공은 상배(喪配)후 이민 망명운동의 독신생활 18년 만에 박용만의 간곡한 권유로 평안도에서 사진들고 이역만리 찾아온 단양이씨 이찬성과 44세에 하와이에서 재혼하여 1914년 공의 둘째로 아들 천혁(天爀) 미국명 헨리 덕소(Henry Dukso), 1916년 공의 셋째로 딸 하나 미국명 한나 하나(Hanna Hana), 1918년 공의 넷째로 지혁(地爀) 미국명 에드워드 합소(Edward Hapso), 1920년 공의 막내로 인혁(人爀) 미국명 윌리엄 한소(William Hanso)를 얻으셔서 이들 모두 다 미국 의학계 박사 등 저명인사가 되다. 그간 지사의 유해봉환을 위하여 향리의 문양목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력을 한 결과,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지사가 조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유해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2025년 8월 13일 -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서 국무총리가 참석한 유해봉환식이 있었으며 - 충남 태안 생가터(충운사)로 옮겨 많은 주민과 일가들이 참석하여 추모제를 지낸 후 -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동하여 안장식를 갖고 안장되셨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미국에 거주중인 손자 및 증손 9명이 귀국하여 함께 했으며, 향리에 있던 부인 김해김씨 묘도 파묘하여 대전 현충원에 합장하였으니 실로 120년만에 부부가 상봉한 셈입니다.
아래 내역은 문양목 관련 참고 사진입니다


독립운동가 문석봉



❏ 문석봉(錫鳳) 1851 – 1896
❏ 애국지가-의병
❏ 1993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경북 현풍(玄風) 사람.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보명은 봉각(鳳珏)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의 봉기를 이끈 의병장으로 독립운동가이며 국가유공자이시다.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내신 아버지 하규(夏奎)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1893년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 경복궁 오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 해 12월 공주부 진잠(鎭岑)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연산·은진 등 공주부 내 6읍의 사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기까지 하였다. 이 지역 유생들과의 이와 같은 관계가 훗날 경상도 출신인 그가 진잠을 비롯한 유성·회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정권에 의해 취해진 변복령과 단발령 등 제도의 개편을 반대했으며, 일제의 침략 행위를 물리치고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의병활동은 2차에 걸쳐 준비, 수행되었다. 1차 의병활동은 그가 붙잡힘으로써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1895년 2월경 무기를 준비하는 등 의병투쟁의 준비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2차 의병활동은 을미사변 직후에 시작되었다. 1895년 9월 18일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충청도 유성에서 유성의진을 결성, 항일투쟁에 나섰다. 선봉장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에 오형덕(吳亨德), 군향관에 송도순(宋道淳)을 임명하였다. 유성의진의 병사수는 1,000여 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회덕과 진잠에 거주하던 송근수(宋近洙)와 신응조(申應朝) 등 전임 정승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들의 묵인하에 회덕군아의 무기고를 급습,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어 진잠을 거쳐 공주부 관아를 점령하고자 진격했는데, 병법에 능한 무과 출신이고 전투지휘 경험이 있는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상도 지역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오형덕 등과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기를 도모했으나 고령현감의 밀고로, 1895년 11월 대구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1896년 초 동지들과 감옥을 부수고 나와 원주 일대에서 통문을 돌리며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며 얻은 병으로 그 해 5월 낙향하였고, 결국 11월에 죽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을미의병의 기점으로서, 단발령 직후 전개되는 반일의병투쟁의 촉발제 구실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의산수록(義山隨錄) 2책이 전해 오고 있으며, 1934년 이를 저본으로 후손들이 간행한 의산유고(義山遺稿) 2책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으며 * 아래에 영남일보 기사(2016.8.24)와 대전 유성에 설치되어있는 을미의병사적비 비문을 첨부하였습니다
아래 내역은 문석봉 관련 참고 사진입니다


독립운동가 문일민


❏ 문일민(一民) 1894 – 미상

❏ 애국지사 - 평남도청 투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복군총영(總營)에서는 일제기관 폭파, 
      일제요인 암살 등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자는 방침 아래 특공대를 국내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장덕진(張德鎭) 박태열(朴泰烈) 
     우덕선(禹德善) 김예진(金禮鎭) 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제2대에 편성되어 평양에 특파되었다. 
     입국 도중 평남 안주 입석(安州 立石)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에 들어와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후 피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일행 중 여자인 안경신은 피신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았으며,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1921년 9월 삼육대학(三育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24년에는 운남(雲南) 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3월 13일에는 곽 헌(郭憲) 최석순(崔錫淳) 강창제(姜昌濟) 
      나창헌(羅昌憲)과 "이승만탄핵결의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교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에는 상해로 돌아 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5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승인되었고, 
      그후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김 철(金徹) 박창세(朴昌世) 이 웅(李雄=李俊植) 
      왕 웅(王雄=金弘壹)과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군인회간장(軍人會簡章)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가입하여 
      신언준(申彦俊) 임득산(林得山) 등과 제1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유동열(柳東說)과 중령(中領)을 대표한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이후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홍서(金弘 )와 같이 교민단(僑民團)재건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박창세, 
     신공제와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유동열 총장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조국의 광복시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동분서주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pre>


독립운동가 문일평



❏ 문일평(一平) 1888 – 1939

❏ 언론인 –애국지사
❏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 200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號:호암(湖巖) 항렬에 따라 명회(明會)로, 초명은 정곤(正坤), 자는 일평(一平),
문천두(文天斗)와 해주 이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여 종 4품의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0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상해의 대공화보사에 근무하다 귀국하여 중동,중앙,배재,송도중학에서 교편을 잡음
중외일보기자로 있다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고 
국사연구에도 정진해 많은 논문 남김

1905년 도일하여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정칙학교(正則學校)를 거쳐 동년 가을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입학, 
1908년 졸업한 그는 이 시기 관서(關西) 출신 유학생들의 자강운동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에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학회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 편찬원으로도 
     참여하여 국민주권론과 국가독립론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들을 기고하였다.
1908년 귀국 후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의주 양실학교(養實學校),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등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 출입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토요강습소의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를 포기한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예과를 수료한 뒤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강하였으며, 유학생친목회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담당하여 창간호를 내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문창숙


❏ 문창숙(昌淑) 1898 – 1928
❏ 애국지사 -참의부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황해도 신계(新溪) 사람이다.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여,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병졸 17명을 이끌고 
     봉천성 즙안현(奉天省輯安縣)에 주둔하여 활동 중, 부하들에게 밀정 홍종흡(洪宗洽)을 사살하도록 하였다.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江界) 지방에서 군자금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1928년 3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살인교사·가택침입·강도미수·공갈살인이란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문창학


❏ 문창학(昌學) 1882 – 1923
❏ 애국지사 -대한군정서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함북 온성(穩城)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1921년 2월 2일에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김학섭(金學燮) 인솔하에 
소총 10정, 탄약 150발, 폭탄 2개씩을 가지고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연말연시중 일군경의 
특별경계가 심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고 신건원(新乾源)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동년 2월 5일 오후 8시 화룡현(和龍縣)을 떠나 밤이 깊기를 기다려 오전 1시에 그곳의 지리에 밝은 그가 
먼저 도착하여 불빛으로 신호하는 것을 목표로 일제히 사격을 시작,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을 
사살하고 숙고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에 폭탄 2개를 투척하고 일군경과 교전후 피신하였다.
그후 만주 혼춘(琿春)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 등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김학섭(金學燮) 등과 함께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김학섭 이하 13명은 1923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동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김학섭과 그의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문윤국



❏ 문윤국(潤國)    1877 -  1958  
❏ 애국지사 –3.1운동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884 사학(史學) 경학(經學) 등 전통 한학(漢學) 수학
1909 평북 정주 신안소학교 교사
1917 평양 장노교 신학교 졸업
1917-1926 평북정주군 덕흥교회,덕성교회,연봉교회 목사

1919년 선천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平北老會)에 참가 조선독립운동 발기인 서명,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독립청원서에 전국 13도 대표의 1인으로 서명, 
      동년 3월 아이포면 사무소 뒷산에서 수천명의 회중에게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정의와 인도로써 
      독립할 이유를 설명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오산학교 시위 때도 주모자로 결행
1921년 지하운동을 하면서 독립군자금  7만원(圓)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1927-1929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은신생활
1948년 이승만 박사로 부터 3차례나 정치참여를 권유 받았으나 노쇠를 이유로 고사하였음

* 아래 내용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보훈록 기록입니다

평안북도 정주(定州)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7일 선천군(宣川郡) 아이포(阿耳浦) 일대와 정주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 모인 4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자신의 토지를 처분한 돈 7만원을 만주(滿洲)에 살고 있는 김숙제(金肅濟) 목사를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조달하는 등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