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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진 교수(부경대학교 사학과) 2. 조선 목면의 일본 전래 3. 일본의 목면 보급과 재배 4. 목면업 발달과 서민생활 변화 5. 맺음말 목면의 보급은 세계사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지리상의 발견 중에 서양에 유입 소개된 동양의 목면은 유럽도시 및 시민사회를 바꾸어 이른바 생활상의 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동양목면의 유럽전래는 속옷으로서의 뛰어난 감촉, 잦은 세탁에의 강한 특성, 다양한 염색의 가능성 등의 장점으로 인하여 칙칙했던 중세도시 생활을 일변시키게 되었다. 이른바 목면은 서양의 지리상의 대 발견 과정중의 성과로서 서양인들의 생활상을 대폭적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속옷을 입지 못하고 자주 세탁할 수 없는 모직물을 의복으로 삼았던 탓에 비교적 어두운 색감의 서양도시가 갑자기 상쾌하고 환하게 변모하는 데에 커다란 일조를 한 목면의 역할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 과정 중에 인도산 목면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유럽인들은 목면으로 된 속옷의 상쾌함에, 또 아무리 자주 세탁해도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는 목면섬유의 우수성에 매료되었으며, 흰 목면 천에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염색한 천으로 만든 여성들의 화려한 옷은 우중충했던 서양도시의 분위기를 일시에 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리상의 발견으로 시작된 유럽의 제국주의적 진출은 목면을 비롯한 이러한 동양 산물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침략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목면전래는 이렇게 의복혁명을 일으키고, 나아가 서양과 동양의 역사를 바꾸어 버리는 제1차 산업혁면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목면도입은 고려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한반도 전역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특히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본격적인 목면재배에 돌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부 지역은 목면재배에 적합지 않았던 모양으로 주로 남부를 중심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종전의 대표적 옷감이었던 모시 삼베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 조선왕조가 성립되게 되자 일본의 규슈(九州), 쥬고쿠(中國) 지방 영주들이 빈번하게 사람들을 파견하여 무역을 하게 되었다. 이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 토산품 및 서양으로 부터의 박래품을 싣고 와 조선왕조로부터 많은 회사(回賜)품을 받아 돌아갔다. 이때의 회사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는데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초기엔 마, 저포 종류이었다. 그런데 15세기 초 이래로 이 회사품 들 중에 목면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점차 일본 측의 목면 요구가 급증하게 됨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는 ’마에서부터 목면으로‘라는 일본 서민 생활문화에 있어서의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나아가 일본 경제사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 일찍이 목면이 가져온 일상 생활상의 변화에 대하여 일본의 대표적 민속학자 야나기다 쿠니오씨는 ’목면이 가져다 준 행복‘이라고 표현한바 있다. 야나기다 쿠니오는 민속학자로서의 예리한 감각으로서, 목면을 처음으로 알게 된 일본민중들이 당장에 그 노예가 되어 그야말로 멀고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친숙하게 사용해왔던 마포에 대해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게 된 이유에 대해 매우 간결하게 설명하면서 민중생활문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활상과 감각, 그 상쾌한 촉감에 기이한 일본적 문화의 섬세함과 풍요함에 대한 탄생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는 서민생활은 물론이고 일본적 문화성립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와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세계 목면의 길 (1) 목면이란 목면이란 아욱과 목화류에 속하는 1년초 또는 다년초를 말한다. 목면을 의미하는 코튼이라는 용어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하는데,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기록 속에서도 이미 목면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목면은 회교도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영어의 Cotton(코튼)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아어의 qutum 및 kutum 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목면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海島木綿, 이집트 목면, 陸地목면, 아시아목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면모의 길이, 강도 , 색상, 숙성도, 균일함, 섬유의 섬도 등에 따라 그 품질이 나뉘는데, 기계방직에는 섬유가 길고 가는 것이 좋은데 , 면모의 길이는 해도목면이 가장 길고(3.81~5.08cm) 아시아목면이 가장 짧다(0.95 ~ 1 91cm)고 한다. 일반적으로 면모의 용도는 ①의복(방적)의 원료, ②이불솜 ③화약 및 셀를로이드 원료 등으로 들 수 있으며, 특히 목면이 의복의 원료로서 상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인 것 같다. 즉 실의 강도가 강하여 방적하기 쉽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뛰어나 촉감이 좋으며 색감과 광택이 좋으며 염색하기 쉬우며, 나아가 섬유 사이가 中空인 까닭에 중량이 가벼우면서도 보온력이 매우 우수하며 흡수성이 매우 뛰어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목면 종자는 약 20% 정도의 유지분을 포함하고 있어 씨를 짜서 식용유(사라다 오일 등)를 만들기도 하고, 그 찌꺼기는 매우 우수한 유기질 비료로서도 중보되어 왔으며, 또 목면을 따고 난 뒤의 고목은 연료로서도 매우 소중하게 사용되어 그 용도는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2) 코튼 로드의 길 서민들의 의복생활에 커다란 변화와 혁명을 가져온 목면의 기원과 그 전래과정에 대하여 살펴보면, 현재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구대륙에서는 인도가 이미 약 5,000 여년 이전, 중국이 약 3,500년 이전 목면이 재배되었다고 본다. 한편 조선의 재배기원이 640여 년 전이라고 보는 견해는 너무 늦은 것 같은 감이 있다. 아마 추후의 연구 성과에 의해 수정될 것이라고 유추하는 바이다. 한편 목면재배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면, 목면은 세계 각지에서 각각 별개의 기본종자로부터 독자적으로 재배된 것 같다. 가장 오래된 목면은 BC 59세기 무렵 멕시코 지역의 육지목면으로 추정되며, 이외에도 신대륙에서는 BC 26세기부터, 페루지역에서는 페루목면, BC16세기경 부라질지역에서는 부라질목면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1704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 지역으로 유입도어 주로 육지목면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동양의 대표적 목면생산지인 인도에서는 '기다치 목면'이 가장 오래된 목면종자로 알려져 있다. BC 26세기 경의 인더스강 하류 모헨죠다로 유적에서 綿布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도 最古의 문헌인 리그베다(B.C. 1300~1000)에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시로바나‘ 목면 종자가 인도에 이어 고대부터 재배되고 있으며 이후 유럽에도 전래되었다. 그리나 후일 종래의 주류를 이루던 아시아계통 목면들이 대부분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의 육지목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마(亞麻)를 의복으로 하고 있었던 탓 때문인가 목면재배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13~14세기에 이르러 비로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집트목면은 주로 19세기에 이르러 유입된 페루목면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10세기 이후 인도로부터 종자가 유입되어 12세기부터 본격화 되었다고 하는데 송말원초 무렵에는 복건성을 비롯하여 강남지역에 까지 보급되어 원대의 1289년엔 절동, 강동, 강서, 복건 지역 등에 木棉提擧司가 설치되어 매년 목면 10만 필을 수납하였으며 1299년 각 지역 행성으로부터 수납되는 목면도 50만 필에 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에 목면이 유입된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려 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와 경상북도 의주군 운산면에서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조선목면은 다시 일본으로 전래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목면 이전의 시대 – 추위와의 싸움 목면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일본의 고대, 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모시와 삼베를 중심으로 한 麻의 재배 ,방적 ,직포의 시대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각 개인의 농가에서 본인들 자신의 필요한 직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 농가의 여성들은 매우 손이 많이 가면서 또 능률적으로 그다지 효능이 좋지 못했던 이러한 마포 재배 및 직포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뒷날의 목면시대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포 즉 삼베는 섬유조직이 매우 듬성듬성하여 통풍성 측면에서는 매우 뛰어나 여름 의복으로서는 최적격이었으나, 탄력성이 부족하고 촉감이 그다지 좋지 못하여 겨울에는 여러 겹을 겹쳐 입는다 해도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그다지 적합지 못하여 상당히 추위에 시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힘든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된 목면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중국이나 조선에서부터 목면제품이 완전한 수입품으로서 전해진 시기와, 두 번째 단계는 일본국내에서 목면의 재배, 방적 ,직포가 직접 시행하게 된 시기이다. 그러면 목면 관련 기록이 일본 문헌상에 언제부터 나타났던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헌상의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戰前 일찍이 철저한 사료조사를 통하여 목면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해왔던 오노 고우시(小野晃嗣)에 의하면 元久 1(1204)년 무렵 송나라 상인이 일본에 목면포를 가져온 것으로서 당시 일본에는 없던 물건이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가마쿠라 시대초기에 이미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심유 관련 유물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 검증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가설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正平12(1357)년 10월 17일, 室覺寺의 無隱元晦가 히다치 호운지(常陸 法雲寺)의 후암 종기(後菴宗己)에게 보낸 편지 속에 "木綿方(○)一領 聯表微志" 라고 기록하고 있어 아마도 禪僧들 사이에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목면의 袍衣가 매우 귀중품으로서 취급되고 있었음을 추측되고 있으며, 또 남북조 시대에 작성된 『庭訓往來微 속에서도 '綾紫小抽','上品細美','單 之絹'등의 의료와 나란히 木綿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I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점차 목면의 사용실례에 대한 기록이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목면은 중국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박래품으로서 아직도 귀족사회에 한정된 매우 고귀한 물품이었다. 아직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가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 목면의 일본전래 일본에서 아직 목면 재배가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조선에서는 목면 재배가 시작되어 매우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었다. 조선도 원래는 모시와 삼베의 나라로서, 고려시대 말기까지는 麻布가 물건매매의 교환수단으로서 화폐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14세기 후반 고려 말 공민왕13년(1352~74년 재위) 무렵, 원나라에 갔던 사신(문익점)이 귀국하면서 목면 씨를 가져온 것을 계기로 약 10년 동안에 한반도 전역에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 말기 무렵부터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1392년 조선왕조가 성립하였을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목면제배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 같다. 기상 조건으로 인하여 한반도 북부는 목면재배가 불가능하였던 것 같으나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목면재배가 확대되어 의복생활에 있어 모시와 삼베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에 일본에서는 쥬고쿠(中國) ,규슈(九州)지방의 守護大名 및 유력한 國人영주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사신들을 한반도로 파견하여 무역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왕조는 일본국왕(=무로마치막부 쇼군) 혼자뿐만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오는 大名 , 國人들과의 무역도 그대로 수용하는 외교방침이었던 것 같다. 이에 일본 측 사절단이 비교적 빈번하게 자주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의 토산품과 남방(서양) 수입품을 싣고 갔으며, 그 대신에 조선왕조로부터 다양한 많은 하사품을 받았는데, 초기엔 모시, 삼베 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應永13(1406)년 일본국왕의 사신에 들려 보낸 하사품 중에 종래의 모시, 삼베 이외에 '靑木綿'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 2년 뒤인 오우치(大內)씨가 보낸 사신에 대해서도 '綿布'가 하사되고 있다. 이것은 오우치씨가 수오우, 나카도를 중심으로 한 유력한 수호대명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왜구 문제 및 무역 문제 등에 있어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쇼군 사신단과 비견될 만한 특별대우를 하여 목면을 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대명, 국인에 대한 하사품 중에는 귀중품이었던 목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應永25(1418)년부터 동 30(1423)년의 5년 동안 사이에 조선왕조의 일본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 중에 목면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이어 삼베와 모시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종전의 귀중품이었던 목면의 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점과 일본 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급증에 의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宝德3(1451)년 “살우일 삼주 태수 미나모토 다카히사”가 문종의 즉위를 축하하여 사신을 보내어 많은 선물을 보내었는데 그에 대한 조선왕조의 하사품이 "綿布 2,394匹"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 측의 희망이 면포로 집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李朝責錄』 世祖 成化3(1467)년 8월 己亥조 기사에 “사단, 제용 양소의 비축분은 면포가 20여 만 필이고 면주는 단지 2,000여필”이라는 내용은 목면 비축분이 면주 비축분의 100배나 됨을 알려주고 있어, 한반도의 목면생산 급증과 더불어 이에 국고 비축도 목면을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文明2(1470)년, 日本國 因伯丹 三州太守 山名少弼敎豊도 사절을 조선으로 보내어 호키(伯耆)지역 만부구찌(万福寺) 수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대장경 1부, 경자 1개, 목면 3천필, 인삼 500근, 미곡 500석, 대발 2개”를 요구했으며, 文明5(1473)년에는 "일본국 防長攝泉 四州太守 大內別駕多多良政弘"이 세이쇼지(淸水寺)의 재건하는 비용으로 銅錢 ,綿주,綿布 등을 요구하여 <정포 일천필, 면포 일천필, 玄米 500碩>을 얻어갔다. 이 무렵부터 大名 및 國人領主들의 대조선 무역 형태가 동, 철을 조선으로 수출하고 그 댓가로 綿布를 얻기를 희망하는 형태로 일반화 되어 갔다. 그리하여 文明7(1475)년에는 서울의 왜관무역과 경상도 浦所무역으로 지급된 면포가 모두 27,800필이었으며, 이듬해 文明8(1476)년에는 37,421필이라는 급증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점차 위기감을 느껴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왕조에 가져다 준 것은 대체로 사치품이 많았으므로 이것을 목면으로 교환하는 비율을 변경하여 종전의 황금1량 = 면포 30필의 비율을 고쳐 황금 1량 = 면포25필이라는 식으로 목면의 가치를 높이고, 회사품의 하사 시에도 正布, 綿紬, 목면의 세 가지로 주는 방식을 취하여 목면 국외유출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延德2(1490)년 대마도의 宗貞國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일본 측은 오로지 목면으로만 받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싶어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에 조선정부는 곤혹하여 공적무역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 및 기타규슈, 산인(山陰)지방과 조선정부는 원래 작은 배로서 왕래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었음으로 양국간 민간상인 간의 무역거래까지도 포함한다면 분명히 급증한 일본 측의 요구가 한반도에 있어서의 내수분까지도 위협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왜 이렇게 급격하게 목면수요가 늘어났을까? 때마침 일본은 오닌의 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 확대되었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 전국시대의 전성기로써 각 지역 영주들의 국운과 사활을 건 전쟁수행에 필수불가결한 군수물자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비상 사태적 시대적 요구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목면이 병사들의 의복을 비롯하여 총포인 화승총, 선박 등의 제반 군사적 용도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조선목면 성능의 우수함을 알게 된 일본 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가 더욱 더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급증일로에 놓인 일본의 목면무역에 대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음으로 목면의 대일 수출에 대하여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에 다급해진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당목면(唐木綿)을 수입하려는 동향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단 이 단계에 일본에 전래된 목면은 국내의 전국적 재배로까지는 전개되지 못했던 것 같다. (1) 목면재배 초기관련 사료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는 규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이 벼농사(稻作)가 기타규슈(北九州)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동쪽지방으로 전파되어간 것과 거의 같은 발자취를 따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거의 동시적으로 각지에서 병행하여 종자가 전파되고 이곳저곳에서 면작이 시행되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때 호쿠리쿠(北陸), 도호쿠(東北)방면이 다소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로서 국내목면 재배의 개시와 확대를 에도시대 전기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보다도 빠른 시기, 즉 16세기 중엽 무렵 전개되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우선 일본인들이 목면을 알고 그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말부터 I5세기 사이라고 보고 있다. 이후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면을 손에 넣기 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하는 한편, 조선왕조에 대하여 목면수출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초 외국의 목면수입에 의존해오던 길이 끊기게 되는 오닌의 난(1470~1480년) 전후부터 일본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 출현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빙사료로서는 채택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아래에 인용되는 사료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본국내 목면재배 관련 최초의 기사로서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문명11(1479)년의 지쿠젠쿠니 가유타노쇼 나츠쇼등연서료족주문(筑前國粥田莊 納所等連署料足注文) 속의 "木綿壹端令賢房에進之"라는 기술을 들 수 있다. 가유타쇼(粥田莊)라 불리우는 장원은 하카다 동쪽 편에 있는 장원으로서 그곳의 관장하는 난도코로(納所) 공문 기록으로부터 영현방(令賢房)에게 목면 일 단이 진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유타노쇼라 불리는 장원은 高野山 삼미원의 영지로서 이 문서도 이 금강삼매원에 전래되어 오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영현방도 이곳에 거주하였던 스님이었으리라. 여기서 料足의 청산과 관련된 기술에 이어서 <토산물을 진상하여 보내는 일(送進上之土産事)>라 하여 진상품 물품 속에 이 목면이 거론되어 있다. 즉 목면 일단을 일부러 멀리 있는 규슈지역에서 부터 보낸다는 사실은 당시의 실정상 아직도 일본 국산 목면이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일 터이다. 土産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지방의 향토 토산물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수입품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던 목면이 가유타 장원이나 혹은 그 주변에서 산출되었으므로 그 고장의 자랑하는 토산품으로서 영현방에게 보내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사료만으로 이렇게 단정하기에는 다소 불안함이 남지만, 나가하라 게이지는 일본에서의 목면재배와 관련된 최초의 사료로서 볼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山科家札記』라는 일기의 長亨2(1488)년 9월 1일자와 明応1(1492)년 8월 3일자의 기술에서 목면을 의미하는 '기와타와 와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래로 면(綿)이라는 글자는 모두 누에고치 실로 만든 眞綿을 의미하여 왔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기와타'라고 히라가나로 기술한 것 같다. 그리고 '와타노 아후’라는 목면 종자를 짜서 만든 綿實油이다. 이 면실유는 식용인 것 같으나, ‘나무통七十'이라는 숫자는 너무 많은 것 같으므로 다소 의문이 있다. 등유요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목면 보급지역 일본근세 즉 에도시대 대표적 면작지대는 오사카만 연안 즉 기나이 야마토, 셋츠 가와치, 이즈미 지역에 밀집하고 있으며 특히 이 지역 생산 목면들은 기술적, 생산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상품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서쪽은 구주로부터 동쪽은 관동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에도시대 이전부터 목면재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역시 동북지방으로의 전개는 아직 안되었던 것 같다. 일본 국내의 목면재배는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관서지역과 관동지역, 동북지역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갔다. 2) 목면재배의 제 단계 – 이기 생략 16세기 일본국내에서의 목면생산의 보급, 전개에는 이를 촉진하는 강한 수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麻에서 木綿으로라 하면 서민 의복의 재료가 마에서부터 목면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민 복식 측면에서만 고찰하기엔 편협한 감이 적지 않다. 전국시대 급속하게 목면생산이 발전하게 되는 원인에는 당연히 그 시대 특유의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의 논문 「木綿以前의事」는 그의 관점 (常民의 생활) 문제로서 논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는 목면 등장이 몰고 온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향과 의미에 대해 살펴볼 때 그 용도의 다양성 측면에서 16세기에 있어서의 구체적 조건, 특수성에 입각하여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1) 군복으로서의 목면 문명2(1470) 무로마치 막부의 재정을 맡았던 만도코로의 집사 이세마사치가는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어 목면을 요청했으며, 이어서 文明5(1473)년 오우미(近江) 이즈모(出雲)의 수호 교코쿠 마사즈네가 자신의 영지인 오우미, 이즈모지역이 오우닌의 난에 휘말려 전쟁터로 바뀌어 인민들이 군인으로 동원되어 농토가 황폐화되어 사람들이 조악한 갈포 종류 정도만 겨우 걸치게 되었다. 이에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다급하게 귀국의 면주 및 목면을 보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청원편지이다. '臣之蔽邑'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의를 취하는 문장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절박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편지에서 목면의 사용용도가 군복임을 명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제반 군사용으로서의 목면 – 진막, 식진, 우직, 마의 등 군복, 무사 복장과 더불어 군용 목면으로서는 깃발, 노보리(幟), 진막(陣幕), 陣羽織, 馬衣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시위효과를 가진 것이기도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별하거나 지휘관의 소재 등을 알려주는 등등, 전쟁 시에는 빠뜨릴 수 없는 표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색채의 선명함이 요구되었다. 이 점은 야나기다 쿠니오씨가 지적한 바 있으며 마포의 경우 염색이 선명한 색감을 얻을 수 없는 데에 대하여 목면은 원하는 색깔이 그대로 선명하게 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진막 및 노보리 등에도 목면은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목면의 초기용도는 서민들의 의복으로서 보다는 군수품으로서 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3) 화승총의 화승으로서의 목면 목면이 직접적인 군수물자로서의 성격을 띤 대표적인 예로서 種子島銃의 화승을 들 수 있다 火繩銃이란 銃身의 측면에 철확(절구)모양의 구멍(구덩이)을 가진 화약통을 붙여 바닥의 불구멍이 총구멍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또 화약통에는 화약 뚜껑이 덮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격 시에는 총구로부터 검은 색 화약을 총신의 바닥까지 채워 탄환을 장착하고 화약통에도 약간의 화약을 넣어 화승의 힘을 빌려 화약이 점화되어 총구 부분의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하게 하는 것이다. 화승이란 종자도총 그 자체는 아니지만 화승이 꺼져 있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한편 화승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드디어 결전에 이르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화하기 쉽고 또 다소 버틸 수 있으며 간단히 꺼져버리지 않는 그런 것이라야만 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는 화승총의 불이 염천의 더운 날씨에는 너무 빨리 타 소진하지 않도록 우천 시에는 화승의 불이 잘 붙지 않거나 또는 꺼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이 화승총의 화승이 처음에는 대나무 소재였으나 차차 내수성이 강한 목면제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목면으로 된 화승총이 중보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범선의 범포(돛) 로서의 목면 목면의 용도 중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帆布이다. 전국시대라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빨리 대량의 물건을 신속하게 운반하는 여부는 그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이 속도의 증가에 가장 중요한 일익을 맡은 것이 바로 목면으로 만든 돛이었다. 慶長 16(1611)년 모우리 쇼즈이(毛利宗瑞=毛利輝元) 사다메가키(定書)에 "빠른 선박은 목면 돛으로 갈색 무지이다"라는 표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짚으로 만든 돛과 왕골 대로 만든 돛과 비교하여 목면 돛으로 된 선박 쪽이 속도가 빠른 것은 목면이 바닷바람을 잘 품어 달리기 쉽고 비나 바닷물에 젖어도 다른 소재의 돛에 비하여 빨리 마른다는 점 또 조작하기 쉽다는 등의 여러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아무튼 목면 돛의 등장은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상 커다란 의미를 가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무로마치(室野) 중기이후 발달 전개된 선박의 대형화가 목면 돛에 대한 수요를 더욱더 급증시키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 전국시대는 상품유통이 활발하여짐과 동시에 지방에서 도시로 라는 구심적 물류 유통 뿐만이 아니라 각 지방 상호간의 물자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각 지방을 근거로 성장한 전국대명들은 군수물자 확보라는 전략상의 이유에서도 어용상인들을 고용하여 대량수송에 주력하였으므로 더욱더 선박의 대형화가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목면 돛에 대한 수요가 바로 목면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2) 서민생활 변화 목면의 경우 삼베와는 달리 일찍부터 상품적 성격이 농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마의 경우, 고대에서는 自家소비분을 제외하고 유통시장에 방출된 것은 일단 용,調로서 국가로 취합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에서도 年貢이나 在家役 등과 같은 장원제적 취합이라는 형태로 변화하기는 하였으나 생산자 농민의 손으로부터 근소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직접 지방시장으로 방출되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 후기 무렵부터이었다. 무로마치 전국시대로 들어서면 중앙지역의 나라사라시(奈良晒) 같은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상인들이 에치고(越後) 등 특정 모시와 삼베 생산지로부터 靑苧라는 중간 상품형태로서 다량으로 사들인다는 형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유통량은 후일의 목면과 비교한다면 아직 소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저마의 방적, 직포생산능률의 비효율성이 대량생산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국적으로 自家用 생산이 되고 있었으므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를 포함하더라도 상품시장은 대체로 협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목면의 경우, 상품 유통적 성격을 농후하게 띄고 있었다. 우선 목면 직물이 조세로서 직접현물 형태로서 지배층의 손에 수합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목면은 각大名등의 상품으로서 영 내외로 유통되었으며 이에 대해 대명들은 목면의 역이라는 형태로 役錢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영내 경제 정책의 관점으로부터 영외반출을 통제하기도 하고 원활한 거래를 위하여 다양한 규정을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그 전제는 일단 조세로 들어온 물품의 유통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를 비롯한 현지인들 손에서 상품으로서 유통시장에 투입된 것이었다. 원래 이 단계에서도 목면의 생산형태는 농가의 가내노동에 의한 부업적인 성격에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산규모 및 시장에의 투입량을 마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방대한 양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마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겨울부터 봄에 걸쳐서 자신들의 소비분도 포함하여 1호당 생산량이 높은 직포 능력을 가진 여자 한사람에 대해 기껏해야 3~5反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그것도 에치고의 織布지역 같이 산지집중이 전채된 곳은 그만큼 전문화된 경우에 속한다. 이와 비교하면木綿織은 實綿으로부터 紡績하여, 직포하는 노동 작업이 전반적으로 월등하게 효율이 높았다. 따라서 생산농가로부터 유통시장에 투입되는 목면포의 수량은, 대체로 가내 부업적 생산 형태를 취하면서도 횔신 많았다. 또 그에 대한 수요도 사회분업의 진전, 도시소비시장의 확대 속에서 마의 경우보다도 휠씬 높았다. 3) 경제구조의 변화 목면은 16세기 무렵엔 일본 국내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 전반 무렵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용도도 군수 용품적 성격에서부터 저마를 대신하여 서민들의 일상의복 재료로 변모하게 되었다. 더욱이 목면은 저마와 달리, 그 재배에서 가공까지 분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목면업의 상품 경제적 성격은 주변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일본근세 사회 경제구조 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藍作과 금비로서의 호시카(마른 멸치) 출어, 이에 따른 回船업 발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藍作의 발달-아와(阿波)지역의 藍(남=청색염료)생산 남(藍)은 고대이래로 저마에 사용되어온 염료이었으나 중세말기 그 수요가 증가하여 靑苧의 생산증가와 더불어 상품생산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남의 상품화는 일본이 목면시대로 돌입하여 그 목면의 염료로서 각광을 받게 되는 이후, 종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목면의 경우, 紡績 ,직포 생산과정의 높은 효율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고 나아가 또 서민 의복으로서의 소비가 증가하게 되자 그 염료인 남의 수요도 동시에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와 지역이 남의 주 생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급자족 및 기내지역에서의 일정한 상품수요를 충족할 생산은 종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목면의 폭발적인 수요증가로 인하여 생산지 집중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와번은 이미 蜂須賀씨가 입국한 이듬해인 天正14(1586)년 吳服屋 마타고로(又五郎)를 屋司로 임명하여 屋役을 징수하게 하고, 寬永2(1625)년에는 '藍方役所'를 설치하고 있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와번의 재정과 관련된 중요 생산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明曆~万治연간(17세기 중엽) 무렵. 현 도쿠시마겐 이타노군 아이스미마치(德島縣板野郡藍住町)를 중심으로 이른바 藍園28개촌이라 불리웠던 지역에서는 수백 町步에 걸쳐 藍밭이 형성되었으며 延室~元祿연간(17세기 후반)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판매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正德3(1713)년 간행된 책에서는 아와에서 생산된 남의품질이 야마시로(山城), 셋즈 다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산량 면에서는 아마도 에도시대 전반기부터 아와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주요산지였다. (2) 어업기술 발달 목면의 상품생산화는 그 생산 증대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비료, 즉 금비 호시카(干鑛)에 대한 급격한 수요증대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멸치수확을 위한 타국 출어가 발달하게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치바현 九十九里○, 서쪽으로는 대마도해역에 이르는 멸치어업이 전개되었다. 이와같이 마른 멸치는 목면재배 증가와 더불어 대량생산되어 오사카로 집적되었다. 正德4(1714)년의 오사카(大板) 입하 상품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그 입하량이 많은 순서대로 살펴보면 米, 木綿류, 菜種, 材木, 멸치, 紙, 鐵의 순서로서 멸치는 다섯 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3) 운송업의 발달 – 이기 생략 (4) 명치시대 이후 – 이기 생략 이상에서 살펴본 일본에 있어서의 목면도입 및 그 보급양상, 경제적 사회적 변화 등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목면의 일본전래 이전의 시대상에 대해서 살펴보면 고대 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저마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삼베 누비옷을 입고 겨울을 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음으로 엄동설한 추위와의 투쟁이 매우 힘들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추위와의 싸움이라는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이 바로 조선 목면의 전래라는 것이다. 둘째 조선목면이 언제 일본에 전래되었을까 하는 시기에 대한 문제로서 15세기 주안 일본 서남지역 쥬고구 규슈의 유력한 슈고다이묘 및 國人 영주들을 중심으로 사신을 보내 목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때마침 일본이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 지역 영주들의 국운과 사활을 건 전쟁수행에 필수불가결한 군수물자, 즉 군복, 화승총, 선박 등의 용도에 목면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단 이 무렵 일본에 전해진 목면은 아직 본격적인 재배단계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셋째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보급과 지배는 지역적으로는 규슈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관서지역과 관동지역, 동북지역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시기적으로는 에도시대(1600 – 1876년) 이전에는 규슈 ~ 관서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났으며, 17세기부터 전반적인 목면재배가 전개되어 목면이 점차 서민들의 의복으로서 공급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단 이 단계에선 목면재배가 대체로 밭 재배 작물적 성격을 띄웠으며, 또 목면 생산과 작물업의 분업이 매우 국한된 지역에 한정되었고 유통과 판매도 아직 그 잉여생산물의 일부가 유통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 ~19세기에 이르러 목면의 전국적 시장 및 전국적 보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에도시대의 대표적 면작지대는 오사카만 연안 즉 가나이, 야마토, 세쓰, 기와치, 이즈미 지역에 밀집하고 있으며 이 지역 생산 목면들이 매우 우수한 상품으로 인정받았으며 오사카를 중심으로 집하 판매 관련 상인들의 조직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근세후기 특히 문화 문정(1804 - 1830년) 연간을 고비로 오사카시장으로의 목면 집하 량이 감소하고 에도시장으로의 집하 량 증가라는 유통로의 변화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관동지역 목면업의 발달과 생산량 증가에 의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넷째 목면전래가 일본 서민생활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목면의 초기 용도는 군복을 비롯하여 진막(陣幕), 마의(馬衣), 화승총, 범선 등 군수물자에 사용되었으나, 17세기 이후 전반적 보급과 더불어 서민들의 의복 등으로 용도가 확대되자 서민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상품 농작물로서의 목면재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고성능 구입비료인 호시카, 아부라카쓰의 투입, 고용노동 투자를 통한 집중적 노동력 투자, 직포 과정의 분업화 등을 통하여 지방 농민들을 화폐경제 속으로 끌어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목면업의 발달은 남(藍)을 비롯한 염색업, 호시카 획득을 위한 타국출어를 통한 어업기술, 운송업 등의 발달을 동반함으로써 일본 근세사회 경제구조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남색염료는 아이조메(藍染)라는 일본 특유의 염색법과 문양을 발달시켜 “일본적 전통미”라 부르는 일본문화의 전형이 탄생하게 되었다. 다섯째 일본 근대사회에 지대한 양향을 미쳤던 목면은 명치유신 이후 전개된 산업근대화 정책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명치 29(1896)년 의회에서 면화 수입관세 규정 철폐가 통과됨으로써 면화수입을 반대하던 목면재배 농민들은 큰 타격을 받아 이를 기화로 일본 국내 목면재배가 소멸되고 말았다. 1890년대에 이르러 수입방적기 및 수입면화 도입으로 시작된 면방직업의 근대화는, 일본의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 일부 내용은 생략하였으니, 원문을 보려면 [문익점과 목면업의 역사적 조명- 아세아문화사 2003.11.21 출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