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교수 (경상대학교 사회교육학부)

1. 머리말
2. 후대의 평가와 국가 및 관의 포전(褒典)
3.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4. 맺음말

1. 머 리 말

三憂堂 文益漸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지대한 영항을 미친 인물이다.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중에서 “衣”의 부분에 미친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 조선시대의 여러 지식인들도 지적했듯이 문익점의 목화 씨앗 전래는 조선시대의 衣冠文物을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후대의 유명 인물들의 칭송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문익점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글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그것도 그가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퍼뜨린 과정에 집중하거나 그의 정치적 행적에 관한 것을 주로 언급한 것이었다.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문익점의 행적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현창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책의 목적은 문익점의 목면전파 과정 및 그것이 우리 사회와 인근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의 행적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서 필자는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당시 지식인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현창하려고 했던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후 후대의 인물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 왔던가 하는 것과 국가 및 관에서는 문익점에 대해 어떤 포전(褒典)을 베풀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문익점에 대한 현창을 위해 자손들과 지역 사림들이 어떤 활동을 해 왔는가를 실기간행과 증보, 서원 건립 청액운동과 문묘종사운동, 부조묘 복구운동 등을 통해 살펴보고, 지역 사림들 중에서도 특히 문익점의 고향인 단성의 사림들이 벌였던 적극적인 활동의 내용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국가의 포전이나 후대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에는 자손과 인근 사림들이 그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일정한 기여를 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 자료로 이용한 것은 1900년에 편찬된 『三憂堂實記』이다. 이 실기가 나오기까지 문익점과 관련된 문헌은 여러 차례 증보되면서 이름도 『忠宣公行蹟記』(1766), 『江城君事實錄』(1788)에서 1818년부터는 『삼우당실기』로 바뀌고 1870년에는 『道川院蹟』도 만들어졌다. 필자는 이중 『강성군사실록』과 『도천원적』도 참조하였다. 이외에 19세기 중반 도천서원에 간여하였던 李邦儉(1798-1865)의 『道淵述言』 과 1640년에 만들어진 李時馩(1588-1663)의 『雲窓誌』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2. 후대의 평가와 국가 및 관의 포전

1)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삼우당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역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중에 退溪 李滉이 평가했던 부분을 장황하긴 하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江城縣 남쪽에 있는 培養山里는 전 왕조 때 사의대부였던 文公이 살던 옛터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洪武 16년(1383)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기려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원래 공이 모친상을 당해 산간에 있었는데,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여 지나는 곳마다 무참하게 짓밟아서 인민들이 도망하여 숨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홀로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며 맹세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칭하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모친의 영전이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② 공의 功이라 하는 것은, 至正 甲辰年에 공이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의 거친 곳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 돌아오면서, 길에서 목면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함이 급하기에 가져오는 것을 금지함을 무릅쓰고 주머니에 넣어와 온 나라에 번식시켜 만세토록 길이 덕을 입혔으니, 이것이 公의 공인 것이다.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져 유통된 것은 결국 그 공이 五穀六財와 같은 것이니, 三韓의 많은 백성이 파리해지고 어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환하게 일신시켰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 왕조가 추가로 은덕의 명을 내린 것은 헛된 은전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③ 그리고 공의 효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임해 나타났었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을 칭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 구해낼 수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으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일차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뀌기 전이었는데 趙俊이 일시적으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었으랴. 내가 염려하는 것은 공의 큰 절개가 이에서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중 ②의 부분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래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면포가 우리 사회에 퍼진 것은 오곡을 경작하는 법과 土, 金, 石, 木, 皮, 草 와 같은 기물의 재료를 다루는 법이 처음 창안된 것과 같은 공헌을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백성이 추위에 떨고 얼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극찬하고 있다.
①과 ③의 부분에서는 그가 솔선하여 유교적 기본덕목의 하나인 효행과 왕조에 대한 절의를 실천했다고 하며 도학적 입장에서의 그의 공헌을 칭송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황은 趙浚이 문익점을 탄핵했던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조준이 일시적으르 문익점을 헐뜯은 말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절의에 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익점은 공양왕 때에 간쟁을 맡은 사의대부로 있으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던 온건개혁파 즉 목은 이색 등과 연대하여 과격한 사전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런 입장은 곧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그 일원인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는 파직되었던 것이다.
새 왕조가 개창된 직후에는 문익점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다만 목면 전래라는 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심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의 업적이 일부 논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면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은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이 강화되고 전 왕조 고려에 대한 충절의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중시하는 사림파들이 발언권을 점차 강화해 나가는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문익점의 충절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황의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 정계와 사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우암 宋時烈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后稷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또 程子, 朱子가 죽은 후 우리 동방의 安裕와 문익점 두 현인이 그 도를 잘 전수하였으니 두 분 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많은 유명 인물들이 詩章을 통해 그의 목면 전래의 공적과 충효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 예로는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南智, 傭齋 成俔(1439-1504), 梅月堂 金時習(1435-1493), 점필제 金宗直(1431-1492), 정여창(1450-1504), 寒暄堂 김굉필(1454-1504), 梅溪 曺偉(1454-1503), 慕齋 金安國(1478-1543), 思齋 金正國(1485-1541), 文山 柳洵(1441-1517), 南冥 曺植, 비隱 이규보, 율곡 이황(1536-1584), 土亭 李之函(1517-1578), 沙溪 金長生(1548-1631), 秋浦 黃愼(1562-1617), 竹林 卓中, 芝峯 이지광(1563-1628), 學沙 金應祖(1587-1677), 판윤 姜世晃(1713-1791), 승지 兪恒柱, 승지 姜연, 단성현감 蒙腐一, 진사 朴정원 등을 들 수 있다.

2. 국가 및 관의 褒典

국가로부터의 포전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여묘살이 했던 효행이 알려지자 우왕 9년(1383)에 조정에서는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최복인을 보내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각을 씌우지 않아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 같다. 權潗(1569-1633, 호 黙翁)의 '孝子碑閣重修記'에 의하면 비를 세우던 당시에 비각도 세운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이전에 쓰여진 이황의 “효자비각기”에는 명종18년(1563)에 와서 당시 단성현감 安琠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비각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해 비각이 소실되자 광해 15년(1623) 당시 단성현감이던 이원길이 앞장서 효자비각을 중건하였고, 헌종 7년(1841)과 고종 25년(1888)에도 재차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또 조선왕조에 들어와 정종 2년(1400)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田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 4인을 두어 묘를 지키게 하고 復戶 2결을 내려주었다. 이로부터 150여년 이후인 명종 16년(1561)에도 문익점의 증손녀 문씨가 감사에게 청원해서 묘사를 중건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문씨의 손자 李源이 주도하고 수령 成遵이 협력하여 묘사와 제전을 늘렸다. 이때 묘사 기문을 쓴 사람은 南冥 曺植이었다.

문익점에 대한 贈職과 封君 등의 조치도 이루어진다. 태종 원년(1401)에 와서는 藝丈館 提學을 증직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다. 그리고 문익점에 대한 부조묘(不祧廟)를 세우게 하여 祭田 100결과 奴婢 70구를 하사하고 복호도 내려주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부민후(富民候)로 봉하였으며, 南智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뒤에 언급하듯이 도중에 사손이 끊겨 부조묘의 제향도 오랫동안 실시되지 못하자, 철종 5년(1854)에는 사손을 세워 문익점에 대한 부조묘 제향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기도 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은 문익점에 대해 賜祭文을 내리고, 또 십여 차례에 걸쳐 傳敎를 내려 자손에 대해서는 특별히 채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와 일반 군역에 충정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계속 지켜지게 하였다.
세조 7년(1461)에 오면 국가의 명에 의해 문익점의 고향인 丹城縣에 祠宇도 건립된다. 후대에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이 올린 上言에는 태종때 서원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아마 부조묘를 서원으로 잘못 착각한 것 같다. 상언에서 언급한 강성군, 부민후로 봉한 시기도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과 차이가 있다.
사실 태종 10년(1410)에 사간원에서 문익점을 위한 사우 건립을 요청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결과, 이미 여러 가지 포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우 건립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문익점 사우의 건립이 조정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2년(1456)에 가서였다. 이때 집현전 직제학 梁誠之가 목면을 전래한 문익점과 화포제작에 공헌한 崔茂宣의 사우를 각각의 관향에 건립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향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천서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어 제향이 시작된 것은 국가의 승인을 받은지 몇 년 지난 1461년이었다. 처음 사우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건립 장소를 선정하거나 단성 사림, 문익점 자손의 재정적 협조 등을 조직하고 구체적으로 사우를 건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도천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고 이건되면서 서원 사액 또는 복액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액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임란 이후 소진된 도천서원을 복구한 이후 단성지역 사림들은 점차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도천서원에도 사액이 내려져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언급하듯이 숙종 34년(1708) 朴恒泰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해 사액을 청하는 등, 청액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조11년(1787)에 도천서원이 사액되었다 . 도천서원과 관련하여 碧溪影堂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삼우당실기』의 연보에는 중종 6년(1511)에 벽계영당이 咸陽에 세워지고, 명종 22년(1567)에 가서 사액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사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丹城違院記'를 썼던 박사휘(1689-1776, 호 黙窩)에 의하면, 正德年間(1506-1526)에 단성현에 벽계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익점 후손 문희석의 기록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서원이 咸湯 碧溪에 있다고 되어 있고 文允明의 上言 중에는 문익점의 行狀이 함양의 벽계서원에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박사휘는 단성현이 함양에 속해 있던 적이 있어서 그런 언급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I5세 때인 忠목王 元年(1345)에 '함양의 碧溪山堂에서 독서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어 함양에 서원이 건립된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박사휘가 살았을 때나 지금 현재에도 함양에는 '벽계'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다. 반면에 단성에는 벽계라는 곳이 있다. 李時馩의 『雲窓誌』에 의하면, 이곳에는 문익점의 조카였던 文可學의 독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곳은 문익점과도 관련있는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박사휘가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문익점의 사우가 세워졌다가 뒤에 도천으로 옮겨져 중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중에 사액된 곳으로 전라도 장흥의 江城祠를 들 수 있다. 강성사는 원래 月川祠라 불리고 있었고, 문익점의 9세손인 楓菴 文緯世(1534-1600)를 제향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운 사우였다. 문위세는 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영조 9년(1732)에 월천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배려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익점이 추가로 제향되면서 이름도 강성사로 바뀌었다. 이 서원도 전라도 유생들의 상소가 제기되면서 정조 9년(1785)에 사액이 내려졌다.

3.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1. 실기 간행과 증보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면, 이상과 같은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사의 칭송이 많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관련 지역의 사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일조를 하였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당시 특정 인물을 세상에 알리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문집이나 실기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와 관련된 문적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文可學 사건 이후 자손들이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져버리고 단성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과 부조묘를 모시는 사손의 대가 오랫동안 끊긴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 임진왜란 등 병화로 인한 소실도 그 한 원인이었다.
다만 증손 사헌부 감찰 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지은 家傳(事實本記)이 있었지만, 이것도 도중에 유실되어 버리고 세상에 공개되지 목하였다.
이보다 악 250년 이후인 숙종 34년(1708)에 고향인 단성에서 향부로들이 명현들이 기록해 놓은 문익점 관련 글들을 토대로 行蹟記를 만들었으나, 이것도 영조 40년(1764)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766년에 도천서원 원임을 맡고 있던 朴思徽(박사휘) 등 단성 사림들이 다시 '忠宣公行蹟記'를 만들었다. 역대 왕들의 褒贈으로 관찬사서 및 고려사에 실려 있는 것, 선현들이 기록해 놓은 것, 文氏族譜, 勝覽 등에 실려 있는 것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도천서원 사액 직후인 정조 12년(1788)에는 장흥의 강성사에서도 후손 泳光이 주도하여 『忠宣公功行錄』(江城君事實錄)을 간행하였다. 여러 가문에 소장된 문익점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집하였는데, 강성사에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江城祠圖와 문위세의 행장도 추가했다. 그러나 행적기나 공행록은 모두 얼마 안 되는 자료를 토대로 편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들의 시기와 연월이 다르고 내용이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 이후 순조 8년(1808) 족보간행 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앗던 文致昌의 家傳이 섬에 살던 후손에게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17대손인 文桂恒 (1766–1829)등이 본격적으로 관련 문적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1811년 각처에 사는 문중 인사들에게 통문을 돌려, 각기 거주하는 고을에 소재하는 여러 선현의 문헌에서 문익점과 관련된 문적은 미세한 것이라도 찾아내어 문집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자고 호소하였다.
그 이후 그는 서울 등지에서 공사서적을 참조하고 차이가 나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1817년에 마침내 『삼우당실기』를 편집하였다. 당시의 명망가였던 金庭堅, 洪永燮, 吳羽常, 閔泰鏞 등을 찾아가 편차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하고 예조판서 金義淳, 공조판서 洪義浩 등에게는 서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18년 겨울 하동에서 인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종결하였다. 이 작업에는 계항뿐만 아니라 관산의 泳光, 안성의 鍾九, 장흥의 達祖, 하동의 翊謨 등 각지의 문중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남평문씨의 世系, 문익점의 年譜, 문치창이 지은 家傳, 列朝褒典, 각 祠院의 事蹟 및 諸公敍述 등이 수록되는 등, 실기가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1827년에도 경기도 安城에서 실기를 다시 발간하였지만, 고친 것은 없고 문중 내에 널리 배포하기 위해 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철종 2년(1851)에 가서도 계항의 아들로서 문익점의 사손이 된 秉烈이 京中에서 실기 증보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 실기에는 海奎律髓集에 실려 있는 忠宣公詞律 三首와 여러 선현의 吟詠 및 輓章 등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계항이 후에 수습한 것으로 1818년의 실기에는 미처 실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해인 1852년에도 전라도 雲峰에서 후손인 文達孝가 삼우당실기를 중간하였는데, 이것은 1851년의 건과는 판본 자체가 다르고 또 世系가 생략되어 있으며 李燮, 朱重翁 등의 “請不祧廟疏” 2편이 추가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1870년에 와서도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단성현 신안의 문익점 묘각에서 문씨 대동보를 발간하면서 실기를 중간하였고, 『道川院蹟』도 새로 편찬하였다. 이때 간행된 실기는 1851년에 인쇄된 실기와 체제가 거의 동일하고, 일부만 약간 증보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남평문씨의 上系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것과 金自粹(1351-1413)의 『桑村集』에 실려 있던 시가 추가된 것, 그리고 1852년 판본에 새로 추가된 “請不祧廟疏”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이 그것이다.
“도천원적”을 간행한 것은 『삼우당실기』에는 도천서원의 내력이 소략하기 때문에 그 내력에 관련된 글을 많이 실어 도천서원을 좀 더 체계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삼우당실기』에 실려 있던 글 중 상당 부분은 목차에 나열하면서 실기에 실려 있다고 註記만 하고 내용은 아예 싣지 않았다.
현재 각 가문과 각종 도서관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실기는 1900년에 후손들이 단성사림과의 협력 단성의 新安思齋에서 중간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삼우당실기와 도천원적에 실린 글을 모두 모으고 일부를 수정해서 아예 새로운 체계로 발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편차와 규례에서 순서가 잘못된 것과 문자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연보에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추가하였다. 가전에 수록되어 있던 庚午封事, 元朝奏對 부분을 빼내어 별도로 싣고, 포은 정몽주와의 聯名疏, 목은 이색 등과의 贈別詩 등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단성의 명망가였던 明湖 權雲煥(1853-1918), 厚山 李道復(1862-1938)등으로부터 검교 받았고, 松沙 奇宇萬(1846-1916), 月波 鄭時林, 勿齋(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에게서 서문이나 발문을 받았다. 이 과정을 정리하여 표로 제시해 보면 <표1>과 같다.

2). 서원 건립,청액 운동과 문묘종사 운동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도천서원을 세우도록 명령했고 강성사에 대해서도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켜 주었는데, 이렇게 되면 서원의 지위가 그만큼 강화되고 관의 지원도 일정 정도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서 이렇게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남긴 공헌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손과 지역 사림들의 문익점을 위한 끊임없는 현창 노력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도천서원의 예를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다.

도천서원은 세조의 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 사액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임란으로 중건한 이후 액자가 불타버리고 사사로운 액자를 걸어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 중에서도 등급이 낮고 관의 지원도 별로 없는 지방의 鄕賢祠와 마찬가지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34년(1708) 단성의 朴恒泰를 비롯한 경상도 유생 300여명이 연명해서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는 서원의 신설이나 사액의 금지조처를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왕이 예조에 논의할 것을 명령했으나 담당 부서에서 동의를 하지 않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 뒤 정조 8년(1784)에 오면 전라도에 사는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장흥의 강성사에 대한 사액을 요구하였고, 이어 이듬해에는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 600여명이 상소해 강성사가 사액되었다. 강성사가 사액되자 곧 이어 정조 11년(1787) 도천서원 복액운동이 일어났다. 李亨復을 비롯한 경기, 경상, 전라의 3도 유생 600여명이 상소해서 도천서원의 액자를 복구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조정에서는 액자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서원을 창립한 이후에는 해당 선현에 대한 奉祀와 사림의 교육장소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여러 가지 규칙과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적절한 운영을 해 나가야 했고, 이는 결국 자손과 인근 지역 사림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원의 건물이 노후화되어 새로 짓거나 고쳐야 했다. 도천서원도 1461년 문익점이 공부하던 별채 三憂堂이 있던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 된다. 그런데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명종 19년(1564)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광해 4년(1612)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13년(1672)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이후에도 중건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1744, 1770, 1797, 1805, 1865년으로 이런 중건과 이건과정에서는 자손과 인근 사림이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을 모신 서원은 도천서원, 강성사 외에 여러 곳이 있었다. 황해도 松禾縣의 三峰書院, 전라도 昌平縣의 雲山書院, 경상도 義城縣의 鳳崗書院이 그것이다. 이중에는 문익점의 자손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면서 그곳에 거주했던 다른 조상과 함께 문익점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건립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창평현 사림들이 문익점의 손자인 越川君 文彬(?~1413)이 유배되었던 곳이라 하여 雲山書院을 세웠는데, 1859년 이곳에 문익점과 손자 長淵伯 文萊를 추가로 제향하였다. 문빈은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월천군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담양, 창평에는 문빈의 자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文致龍(1746-1814, 호 雲齋)과 文天壽(1736-1810, 호 梅堂) 등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는 의성 사림들이 문익점 손자 承魯가 수령으로 와 있으면서 晩川洞에 사묘를 세웠던 것을 기려 그곳에 鳳崗書院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문익점이 이 고을에 처음 목면을 확산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손자인 승로가 의령현감으로 와서 기념지로 가꾸어 놓은 곳인데, 문씨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실기에는 이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서 인조 22년(1644)에도 황해도 유생들이 송화현 桃源 三峰山 밑에 삼봉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송화현에 은거했던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 그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정황도 알 수 없다. 좀 더 다른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볼 여지가 남는다.

자손과 사림들이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말경부터는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정조 16년(1792)에는 생원 李禑를 소수로 하는 다수의 유생들이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상소문을 지은 魏伯珪(1727-1798, 호 存齋 또는 桂巷, 전라도 장흥 출신)가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며 내세운 논리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면을 전파함에 가죽옷과 갈포옷을 입었던 풍속이 크게 변해서 우리의 冠帶의 풍속이 이루어졌고 백성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주나라의 후직과 더불어 사당에 모셔져야 하고 팔도의 백성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제사 지내는 곳은 다만 단성의 도천서원과 장흥의 강성사 두 곳 뿐이니, 삼백 고을의 인심이 그 누가 문묘에 제향되는 반열에 이르도록 노력해서 경모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국가의 금지정책으로 인해 결국 왕에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그 이후 한동안 문묘종사운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기가 분명치 않지만, 1870년을 전후해서 다시 청무운동이 시작된다. 즉 鄭在慶, 朴尙台(1838-1900, 호 鶴山)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문익점의 문묘 배향을 요구했으나 이를 불허하는 왕의 비답이 내려졌다. 그 뒤에도 洪在誠과 朴齋晩 등을 중심으로 한 3차 상소와 金健秀와 沈宜肅 등의 4차 상소가 이어졌지만,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비답이 내려졌을 뿐이었고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3). 부조묘 복구 운동

문익점의 부조묘가 설치되어 있는 단성에는 그의 손자, 증손대에 이르러 자손들이 별로 살고 있지 않았고 단성 이외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男歸女家 현상 등으로 인해 인구 이동이 활발하여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벼슬살이로 인해 서울 근처에 거주하는 현상도 많았다. 문익점의 자손도 마찬가지였고, 봉사손인 종손 이외에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문익점의 자손이 단성에 많이 살지 않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文可學 사건으로 인한 단성 이탈현상이 그것이다.

문가학은 문익점의 동생 益夏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태종대에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2년(1402) 진주 출신인 예문관 직제학 鄭以吾가 진주에 사는 문가학이 비를 내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하여 왕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러들여 시험하였는데 그가 치제를 하자 과연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항상 神衆經을 외워 도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테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 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 후에 효험이 별로 없자 내쳐서 開城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이후 이곳에서 생원 金천, 주부 任聘, 생원 趙方輝, 부정 曺漢生, 소윤 金亮 등 여러 사람과 공모하여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太宗實錄』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妖人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 崔有慶에게 명해 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李叔蕃 尹祗, 형조 판서 金希善, 사헌 집의 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 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 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별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金천에게 말하기를, '이제 佛法은 쇠잔하고 天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神衆經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 있고, 天兵과 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 하니, 김천이 그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任聘, 생원 趙方輝, 전 부정 趙漢生, 전 소윤 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사직 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니, 黃喜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 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말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중대한 모반사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결국 문가학과 일부 핵심 연루자가 처형당하고, 문가학의 어린 자식도 교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의 친족들이 연좌되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한해를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던 朴苞와 문가학 등의 친족들은 제외되었다.

원래 모반죄를 저지르면 당사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와 형제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 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방계로 조카 및 백숙부 등도 연좌되어 먼 곳에 유배되었다. 문익점의 자손들은 이 연좌제의 직접적인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그들에게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문익점 자손 중에도 그 영향을 받아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익점의 손자 文承孫이 '從叔(문가학)의 처형으로 화가 종족에 미쳐 여기저기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는데 공은 溟洲로 들어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정황은 17세기 중반 李時馩에 의해서 편찬된 『雲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운창지』에는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가학이 젊었을 적에 淨趣庵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여 사람을 흘리고 있어 이를 잡아 죽이려 하자 여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둔갑술이 적힌 비결을 제공하였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궁궐 내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문가학은 죽임을 당하고 단성현에는 그 자손들이 살 수 없도록 모두 바닷가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지금 東萊府에 거주하는 문씨들이 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익점의 4대 장손인 光瑞는 큰 피해를 받지 않고 단성에서 살고 있었다. 문익점의 공훈에 대한 국가의 은전이 상당하고 그에 대한 부조묘나 묘사에 대한 봉사를 맡아야 하는 장손이므로 국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광서에게는 서자 彦國 이외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부 박천군수 李鶴(여주이씨)의 아들 李承宗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여주이씨는 단성에서 세거하지 않고 서울 인근으로 이거해 버렸다.

서자인 언국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문중 내에서는 광서의 조부 善仝의 동생인 義仝의 증손 世華를 사손으로 삼았다가 다시 문익점의 제2자 中誠의 5대손인 善昌을 사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단성에 거주하지 않고 경기도 楊州 또는 長湍에 거주하였고 선창의 증손인 彦祥 때에 가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사손이 끊겼다. 그 이후 오랫동안 사손이 끊겨 있다가 19세기에 가서야 중성의 지파 자손 중에 桂恒의 아들 秉烈이 부조묘의 제향을 책임지는 사손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이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손들이 여러 차례 사림을 움직여 부조묘 복구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730년경에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부조묘의 복구를 요구했지만 상신들이 그대로 덮어두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고, 정조대에 와서 장령 李燮이 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뒤 정조 20년(1796)에 다시 장령 朱重翁이 상소를 올려 부조묘 문제를 제기 하였다.

이때에도 국가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자손들의 부조묘 복구운동은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헌종 7년(1841) 문중 내에서 병렬을 사손으로 인정하는 회의를 거쳐 완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호남, 영남, 호서 등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삼우당 자손의 대표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44년에는 관의 허락을 받으려고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연명해서 예조에 상서를 올렸다. 부조묘의 사손으로 병렬을 세우고자 했으나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어 허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1854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유생들이 나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때에 와서야 비로서 국가로부터 다시 부조묘의 계승봉사를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까지는 부조묘가 단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손이 있는 전라도 보성으로 옮겨야 했다. 국가가 인정하는 부조묘를 옮기는 데는 관의 여러 가지 도움이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려 경유하는 고을의 관아로 하여금 옮기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4) 단성 사림의 적극적 참여

지금까지 언급해 왔듯이 문익점에 대한 현창운동에는 자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림들이 참여해 왔다. 그중에서도 단성 사림들의 참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단성현은 원래 작은 고을로서 고려 말까지만 해도 강성현과 단계현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강성현은 진주에, 단계현은 합천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때에 수령이 파견되면서 두 고을이 합쳐져 단성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단성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성 출신의 인물은 진주 출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는 내용에서도 문익점을 진주출신으로 보고 있고, 문가학이 천거될 때도 진주 출신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고을이었기 때문에 문익점과 같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이 고을 사림으로서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가학 사건 이후 단성에는 문익점의 자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사손으로서 단성을 지키고 있던 문광서가 여주이씨를 양자로 들인 것이라든지, 조선중기 문익점의 증손녀로서 합천이씨 季通과 결흔한 문씨가 묘사 중건에 앞장섰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성에서의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 묘사 등의 관리 및 문익점에 대한 현창 작업은 합천이씨 등 외손들과 단성의 사림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양마을에 정착한 합천이씨가 외손으로서 문익점을 현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淸香堂 李源의 역할은 『운창지』에 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효자비각을 건립하는 것과 이를 기념하는 기문을 당시 명사에게 요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딘성의 다른 가문의 사림도 고향 출신인 문익점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느끼고 도천서원의 운영과 중건뿐만 아니라 청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단성에서는 사액서원으로서 내세울 만한 서원은 도천서원 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천서원도 1461년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 되었다.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1564년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1612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가 1672년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그때마다 단성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건하고 관아에 지원을 요청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이후에도 1744, 1770, 1797, 1805, 1865년에 중건되었는데 합천이, 성주이, 안동권, 진주유씨 등 단성의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중건의 실질적인 직임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이중 1865년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서 서원 중건을 주도했던 李邦儉의 “道端述言”에는 당시 서원중수과정에서 단성 사림들이 활동했던 여러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즉 1864년 7월에 도천서원에 비가 새어 여러 가지 집물이 젖고 일부 서까래가 기울고 창과 벽이 일부 무너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이방검은 단성 사림 각 가문에 통지하여 다른 서원의 향사 모임 때 논의하고 전달하여 서원 중수 방향을 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65년에는 講堂과 酒庫를 중수하였고 그 후 西齋, 典廳, 庫舍 등도 새로 세우고 사당의 수리도 시급해서 위패를 강당에 임시로 봉안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여 다시 단성 사림의 각 가문 대표들에게 회의소집을 알리고 있다. 또 이에 드는 비용 부족 때문에 인근 고을에 통문을 돌려 각 고을 사림들의 도움도 요청하였고, 각 고을에 사는 문익점 자손에게도 자금 모금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부 고을의 문씨들이 협조하지 않거나 자금모금을 맡은 일부 인사가 자금을 보내지 않은 등 문제가 생기자, 진주, 하동, 곤양 사림들과 연대해서 이에 대한 징계를 관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단성 사림들은 문익점의 위패 환봉시에는 관의 경제적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708년 박항태 등 단성 사림이 도천서원 청액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사액서원이 된 후에는 權思國 등 단성 사림들이 도천서원에 대한 면세운동도 전개하여 관의 지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방법으로 1708년과 1766년에는 단성 사림들이 行蹟記를 만들기도 하였고 자손들과 함께 실기와 도천원적 편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도천서원이 사액된 후 배향되어 있던 東溪 權濤의 위패 처리로 단성 사림들이 반발하거나 또 문익점의 외손인 합천 이씨와 문씨문중이 묘역과 위토의 관리 문제로 대립하는 등 한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단성 사림들은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에도 단성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중반 문익점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朴尙台가 지었다든지, 이 당시에 이방검 등이 도천서원을 중심으로 각 사림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활동을 했던 것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 맺 음 말

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이 남긴 행적에 대해 후대의 유명 인사들의 칭송은 줄을 이었다.
이황은 문익점이 목면전래를 통해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하고 효행과 절의를 통해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송시열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후직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안유와 문익점 두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문익점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에 국가의 포전은 성대했다.
우왕 9년에 조정에서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고, 후에는 비각도 세워졌다. 정종 2년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田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과 復戶를 내려주었다. 그가 조선왕조에 와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종 원년에는 藝文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하였으며. 그에 대한 不조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侯로 봉하였으며, 세조 7년에는 고향인 단성에 사우도 건립된다. 그리고 후대에 가면 이 도천서원과 함께 전라도 장흥에 세워진 강성사에 사액이 내려진다.

이처럼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사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실기를 간행하고 증보하였다. 그리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고, 소략한 부분은 보충하였다. 그가 제향된 도천서원을 알리기 위해 『도천원적』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도천서원을 중건해서 운영하고 사액을 받아내기 위한 운동도 여러 차례 전개하였다 단성의 도천서원 및 장흥의 강성사 이외에 황해도 송화현의 삼봉서원, 전라도 창평현의 운산서원, 경상도 의성현의 봉강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자손과 사림들은 더 나아가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문가학 사건 등으로 자손들의 단성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부조묘 제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었다.

이런 현창운동에는 어느 지역 사림보다도 단성 사림의 열정이 켰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어서 더욱 더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천서원 건립, 중건, 운영뿐만 아니라 사액운동, 문묘종사운동 등 여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실기의 편찬과 『도천원적』 편찬에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후손, 사림들의 현창활동을 정리하여 보았지만, 이 글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기나 기타 자료가 지니고 있는 사료로서의 한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이 부분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치밀한 분석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단성뿐만 아니라 문씨들이 사는 다른 지역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좀 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갈 필요성도 느꼈다. 자료가 많이 발굴된다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 일부 내용은 생략하였으니, 원문을 보려면 [문익점과 목면업의 역사적 조명- 아세아문화사 2003.11.21 출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