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益漸의 생애와 木綿 傳來 事蹟의 검토
- 文致昌 撰 「家傳」의 내용을 중심으로 - 김해영 교수(경상대학교 사회교육학부)

1. 머리 말
2. 문치창의 가전(家傳)과 삼우당실기
3. 가전 所載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4. 맺음 말

1. 머리말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와 이를 보급시킨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져온 10 餘 枚의 목면 씨앗이 그의 고향(경상도 강성: 현 산청군 단성면)에서 기적적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전국에 보급된 목면업은 농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의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이후 오로지 문익점에게 그 공적이 돌아가게 되고, 더욱이 그러한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가 문익점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衣冠 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功이 강선군 보다 클 수 없고 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한 수 없다”라고 극찬했던 것은 이 같은 사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익점은 비단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金宗直을 비롯해서 鄭汝昌, 金宏弼, 曺植, 李滉 등 영남 유학의 거벽(巨擘)들이 한결같이 목면 보급에 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한편, 더불어 그의 道學과 德行 忠節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이나 「조선왕조실록」의 卒去 기사에 간략하나마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상세한 기록과 관련자료는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이들 기록 간에는 문익점의 생졸 연대와 사환(仕宦)이력, 在元시 행적에 관한 기록에 상위한 점이 있고, 따라서 목면종자의 전래 및 재배 시기와 관련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있어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가 使行으로 元都에 간 시기는 원제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신왕으로 책봉하던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그가 원도에 있으면서 취한 행동에 대해서 『고려사』와 『삼우당실기』 간에 전혀 상반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학술적 성격의 연구에서는 “삼우당실기”의 기록 보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보다 신뢰하여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였던 것을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삼우당실기』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행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家傳」의 존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家傳」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오랫동안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남평문씨 문중에서 족보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순조 8년(1808)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반에 알려진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가운데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이나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보이지 않고 “가전”에서만 확인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가전”의 자료적 신뢰도를 살피는 것은 “삼우당실기”를 통해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문익점의 생애나 행적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검토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문치창의 「家傳」을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가운데 몇 가지 문제시되는 부분에 대해 관련 내용을 검토한 글이다. 따라서 그의 생졸 년월과 사환 이력, 재원시 행적 및 목면 종자 전래 시기에 관한 “가전”의 기술 내용을 주된 검토 내용으로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문치창이 “가전”을 찬술(1464년 찬)하게 된 배경과 “가전”의 발견(1808년 발견)을 전후로 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물에 나타나는 중요한 변동 내용도 살펴보고자 한다.

2. 문치창의 “가전”과 “삼우당실기”

1) 문치창(文致昌)과 “가전(家傳)”

“家傳”은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세조 10년(1464)에 찬술한 것으로 전해지며 “삼우당실기”에 재록되고 있다. 문치창은 문익점의 장자 中庸의 손자로서, 부는 承孫이다. 문치창의 祖 中庸은 문익점의 목면 전래 공적에 대한 음덕으로 태종조에 사헌부감찰의 벼슬에 특배되었고, 그 뒤 사간원 정언의 벼슬을 거쳤음이 확인되는 만큼, 태종조에 관도에 오른 이후로는 상당 기간 고향을 떠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치창의 父 承孫도, 『남평문씨족보』에 따르면 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戶曺佐郎에 이르렀으며 문치창 역시 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監察의 벼슬을 거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문치창이 家傳을 짓게 된 것은 세조 7년의 단성 방문이 계기가 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의 단성 방문이 그로서는 선조의 고향을 처음으로 찾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가전”에 따르면 문치창은 세조 7년(1461) 겨울 선조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三從兄과 같이 서울에서 丹城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 宗家에 들러 선대에 남긴 遣蹟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종가에서 본 것은 병오년(1426)의 화재를 입고 남은 나머지 문적가운데 일부로서, 그나마 당시 화재를 면하여 남아있는 것은 얼마 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해서는 세월이 흐르면 더욱 없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주위에서 선조의 행적과 관련 있는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그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해서 이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에는 세조 7년(1461) 당시 문치창이 단성에 이르러 선조 의 유적지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 쓴 詩와 함께 시의 서문이 남아 있는데,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사년(1461) 겨울, 나는 서울로부터 龜城(단성의 별명)에 이르러 도중에 선조께서 사신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나무는 우리들의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고, 저 언덕과 저기 흐르는 강은 또한 우리의 선생께서 낚시질하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고삐를 놓고 방황하여 눈을 들어 산하를 둘러보니 오래된 나무는 가지가 적어 엉성하고 찬물 흐르는 강은 눈을 내뿜는 듯하여 나를 위해서 감회를 돕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을 사람들은 다 선조를 존경하여 우러러 칭송하기를, "선생의 공은 다만 한 고을이 힘입은 바가 아니라, 한 나라가 힘입은 바이고, 다만 한나라가 힘입은 바 일뿐만 아니라 만세가 힘입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선조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문치창으로 하여금 증조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을 자주하여 그 결과 오늘날 『삼우당실기』 속에 실려있는 「家傳」이 찬술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家傳」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순조8년(1808)에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海島에 살고 있는 문익점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중요한 자료가 문치창이 “가전”을 지은 이래 340여 년 동안 그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다가 남평문씨 족보 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해도에 살고 있는 후손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이밖에 소장자의 인적 사항이나 입수 경위의 전후 사정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는 점도 자료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하튼 현재 文益漸이 남긴 遺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가 순조 19년(기묘 1819년)인데, 삼우당실기의 발행은 바로 이 「家傳」의 발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우당실기』는 문익점의 제 18세손 文桂恒의 주도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삼우당실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가전”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문계항의 다음 설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삼우 선생이 내게는 17대조이시다. 돌아가신지 400여년에 세대가 綿遠하고 宗祠가 屢乏하여 선생이 지으신 詩文과 疏章이 적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집안의 화재로 잃고 다음에는 병화로 소진되어 탕연히 전해지는 것이 없었고 중간에 수록한 것으로 단지 '家傳' 한 본이 있었으니 대개 天順 甲申에 감찰공 致昌이 지은 것이나 이 또한 잃어버렸다. 이후 전하는 것은 특별히 각 집안에서 기록한 약간의 私乘 뿐이었다. 지난 병술년에 단성의 사림 朴思微가 찬한 행적기 한 권은 道川院蹟으로 인해 만든 것이고 또 무신년에 冠山에 사는 宗丈 泳光 씨가 간행한 “공신록”은 여러 집안에 소장된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도답襲 巾衍한 문자일 따름이어서 大義가 궐약하고 錯亂된 것이 파다하며 또 년월과 시대가 상호 그릇되어 뒷날 의혹을 일으킬 곳이 심하였다. 지난 무진 여름에 다행이 족보를 간행하는 일로 인해서 이른바 「家傳」 한 卷을 얻었으니 바로 天順 8년에 遺集한 것이었다. 나는 곧 손을 씻고 책을 펼치니 훤하게 마음의 눈이 열리었다. 이로부터 어리석고 식견이 좁은 줄도 모르고 외람된 생각을 품어 지금까지 선조의 행적에 관해서 잘못 되었던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다 . 이에 선조의 행적에 관한 여러 이름 있는 글과 諸賢이 남긴 문집을 열심히 찾아보고, 비록 한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도 증거와 신빙성이 있으면 애써 한군데로 모았다.

즉 문계항은 문치창이 지은 가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그 동안 그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가졌던 여러 의문이 풀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급기야 그간에 잘못 알려져 있었던 문익점의 행적을 바로 잡아 고치는 일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계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우당실기』의 초간은 이렇듯 「家狀의 발견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家傳」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술이 현전 『삼우당실기』의 삼우당 행적에 관한 내용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삼우당실기』는 가전 발견 이전에 있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잘못 알려져 있었던 부분을 가전의 내용에 맟추어 고쳐서 바로 잡은 결과물이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家傳」의 발견과 『三憂堂實記』의 編刊

앞서 보았듯이, 『삼우당실기』는 초간 당초부터 「家傳」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행적을 중심으로 편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삼우당실기』는 문익점 후손가에서 그 이전에 輯錄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다른 기록과는 차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삼우당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여러 글들을 모아 정리하려는 노력은 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이는 주로 문익점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賜額을 청원하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문치창의 가전을 논외로 하면, 문익점 사후 그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려는 어떠한 형태의 기록정리 작업도 없었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 「行蹟記」라는 것이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행적기」가 만들어지는 숙종 34년은 단성 유림이 朴恒泰를 硫首로 해서 道川書院의 사액을 청원하던 해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행적기」는 도천서원의 청액을 위한 근거 자료의 확보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현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뒤 영조 42년(1766)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 있던 朴思微의 주도로 『忠宣公行蹟記』라는 책자가 편찬되었는데, 당시 박사휘가 쓴 「忠宣公行蹟記序」에는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에 행적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은 알지 못하나 지난 무자년(1708)에 고을의 父老들이 여러 명현이 기록해 놓은 몇 가지 글을 대략 써서 책자로 만들었으나 갑신년(1764) 가을에 尊廳이 화재를 입어 재가 되었다. 못난 내가 마침 욕되게도 서원의 원임을 맡고 있어서 선생의 행적이 없어져 전하지 않음을 개탄하여 고찰할 수 있는 것을 널리 구했었지만 지나간 왕조의 일을 누가 자세히 기록했을 것인가. 나는 같은 직임을 지닌 都命嵩, 朴思權과 더불어 사방으로 물어 찾아, 국조 역대왕의 褒贈은 國乘에 실려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혹 고려사에서 베끼고 혹은 선현들의 기록한 것을 모은다든가 또는 문씨족보와 勝覽에 실려 있는 것 중에서 채택해서 모아 『忠宣公行蹟記』라 이름하였다.

이 때의 『충선공행적기』는 「家傳」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국조 역대왕의 褒贈 기록”과 高麗史, 先師들의 기록, 文氏譜書와 勝覽 등 당시까지 전해져 알려진 여러 기록을 참고로 하여 문익점의 행적을 정리 기술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충선공행적기』 역시 현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살필 길이 없다. “충선공행적기”(1766) 이후 “삼우당실기”에 앞서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관련 기록을 집록한 것으로, 현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 12년(1788)에 文泳光이 편한 『功行錄』이다. 이 『공행록』은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전승이나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수습하여 편집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삼우당실기』가 나오기에 앞서서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의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는 『공행록』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행록』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문익점이 졸거한 시기를 우왕 9년(홍무 16년 계해, 1383)에 비정한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서 추정하건대 현전 『삼우당실기』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정종 2년(1400년)으로 하게 된 것은 바로 「家傳」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전”의 발견은 문익점의 사망 시기를 고려 말이 아닌 조선왕조 개국 이후였다고 하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공행록』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우왕 9년에 비정한 것으로는 "강성군 충선공 부민후 삼우당문선생"이라는 제하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고, 또 영조 48년(1772)에 李彌가 찬한 “神進碑銘 倂序”와 정조 9년(1785)에 黃景源이 찬한 "묘비명 병서"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다. 이들 모두 문익점이 홍무 16년 계해(1383, 우왕 9년)에 병으로 졸하며, 이 때 조정에서 특별히 예장을 명하고 효자비를 세워 정려하였다는 내용을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행록』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기록이 이처럼 흥무 16년으로 나타난다면,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은 조선완조 개국 이전에 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문익점의 졸년이 조선왕조가 개국되기 수년전인 우왕 9년(1383)이 아니라, 조선왕조 개국 후 수년이 경과한 정종 2년(1400)이라는 「家傳」의 기록은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의 기본 줄거리를 새롭게 살펴보게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李彌가 찬한 문익점의 “神道碑銘”이나 황경원이 찬한 문익점의 “묘갈명”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과 관련된 내용은 그 후 고쳐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한 이정 작업의 흔적은 현전 『삼우당실기』에 실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 밖에 “공행록”의 “江城君忠宣公富民候三憂堂文先生”에는 그가 使行으로 入元한 시기를 至正 甲辰(1364)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당시 원으로 가는 사행에는 德興君이 上使, 문익점이 副使, 崔擺가 從事官이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여 “삼우당실기”와 비교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음도 엿볼 수 있다.
戊寅刊 초간본(1870) 『三憂堂實記』의 編次를 보면 (世系) (年報) (遺文) (褒典) (舒述) (追錄)의 여섯 편에 序文과 跋文이 붙어있다. 이를 영조 42년(1766) 박사휘가 편한 『충선공행적기』와 정조 12년(1788) 문영강이 집록한 『공행록』과 비교해 보면, 『삼우당실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가장중요한 변모는 문익점의 생애에 대한 '年報'가 비로소 나타나고, 연보의 내용이 충실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문익점의 생애에 대한 연보가 충실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가전”의 발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삼우당실기를 통해서 현재 일반인에게 알려진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이 얼마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가전”의 자료로서의 신뢰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3. 「家傳」 所載 文益漸의 行蹟

1) 생졸(生卒)

문익점의 생졸 연대는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밝혀 두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전”은 문익점의 생몰 시기를 월일까지 분명히 드러내어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 신미 2월 8일에 태어나 建文 2년 경진(정종 2년, 1400) 2월 8일에 卒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생졸 년월은 그대로 “삼우당실기”에 받아들여져, ”삼우당실기“ ”년보“에 기술된 그의 행적은 모두 이 생몰 연대에 맟추어 기술되고 있다.
문익점의 출생 연도만큼은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의 출생 연도가 일찍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민왕 9년에 한 때 천도 예정지로 계획되었던 신도 한양에서의 東堂監試에 정몽주, 임박 등과 함께 급제하였고, 당시 동방 급제자의 명단이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卒年이 언제인지는 밝히 드러나지를 않아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 못 알려진 듯하다. 그의 졸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조실록”을 포함해서 조선왕조의 “실록”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랜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익점이 언제 졸하였는지는 오랜 동안 확실한 근거 자료가 없어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48년(1772)에 이미가 찬한 신도비명이나 정조 9년(1785)에 황경원이 찬한 묘지명에 그가 우왕 9년(1383)에 졸거한 것으로 새겨지기도 한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가전”의 생몰 기록 가운데 우선 문익점이 정종 2년(1400)에 사망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의 졸년이 언제인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태조실록”에 나타나는 졸거기사라고 할 수 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태조 7년(1397) 6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사망 년월에 대한 “태조실록”의 이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문익점의 졸년이 태조 7년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있음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 원년(1401) 3월에 양촌 권근이 문익점의 아들 중용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서 가운데, “(문익점의) 아들 中庸은 아비의 喪을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고, 이어서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에는 그대로 晉陽에 숨어 있다.”
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종 원년 당시는 이미 문익점이 사거한지 적어도 수년이 경과되었음이 확인되고, 따라서 그의 졸년은 「家傳」에 나타난 것처럼 定宗 2년(1400)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문익점의 생애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그가 태조 7년에 사망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한편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거 기사에 따르면 그의 사망 시 나이는 70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의 출생년은 1328년(충숙왕 15년)이 된다. 이는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의 科擧事蹟에 나타난 출생년(신미년)과 2년의 차이가 있게 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문익점이 졸년 당시 나이가 70이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공민왕 9년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 科擧事蹟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어느 한 기록이 잘못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家傳」에 나타난 문익점의 출생년도가 「前朝科擧事蹟」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은 문치창이 “가전”을 찬할 당시 그가 종가에 소장된 문서 등을 참고하여 선조의 출생 연대를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家傳」에 나타난 그의 졸년이 문치창이 잘못 추정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그의 추정 근거는 「家傳」에 나타나고 있듯이, " 定宗 2년에 禮葬을 명하여 祭田을 하사하고 墓祠을 세우도록 하였다"라고 기술된 부분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증조부의 졸거한 해를 잘못 기록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납득하기 어려우며, 이점 “가전”이 과연 문치창에 의해 찬술된 것 인지를 의심케 하는 단서의 하나가 된다.

2) 사환(仕宦)

「家傳」의 기록이 "열전"이나 “졸기”와 비교할 때 아주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문익점의 생애는 주로 그의 재원시 행적이나 귀국 시기 및 목면 시배 시점 등을 두고 관련 기록간에 상위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와 관련해서 그의 관력에 대해서도 『實錄』과 같은 官撰기록과 「家傳」의 내용 간에는 상위한 내용이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거 기사에서 관력에 관한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左司議大夫 문익점이 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으로 아버지 文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諄兪博士로써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左侍中 李公遂의 書狀官으로 원에 갔다‥‥ 洪武 乙卵年에‥‥ 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左司護大夫에 이르렀다가 졸하니, 나이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을 贈하였다.

이상 “태조실록”의 “졸기”에 드러나는 그의 관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익점은 공민왕 경자년에 급제한 후 처음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고, 계묘년 左正言에 승진되어 원에가기 직전에는 순유박사였고, 원에서 귀국한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며, 그 뒤 목면 보급에 따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洪武 을묘년에 典儀注簿에 제배되고 ,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家傳」에 따르면, 문익점은 사행 이전 시기인 신축년에 藝文館 直講, 임인년에 承奉郎, 계묘년에 사간원 좌정언에 이르고 이 때 언관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원에서 귀국하는 해인 정미년(1367)에는 中顯大夫 藝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直拜되나,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이해 겨울에 成均館 學官에 선발되며, 다음해인 무신년(1368) 겨울에는 禮文館提學 兼成均館司成이된다. 기유년 가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행하고 喪制를 다한 뒤에도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가 그가 다시 벼슬에 오르는 것은 계축년(1373)으로 나타난다. 이 때 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제수되나, 이해 겨울 정몽주 등과 함께 北元 使臣의 접견을 항의하는 소를 올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淸道郡守로 좌천되었다. 그 후 왜구의 침략과 모친상을 겪은 뒤, 무진년(1388) 가을에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兼서연동지사를 제수받았으나, 다음 해 昌王 2년(1389) 8월에 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恭讓王 2년(1390) 8월에 다시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筵同知事 兼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는 것을 끝으로 이해 11월에 신병으로 사임을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상 『태조실록』 졸기와 『삼우당실기』의 「가전」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관력을 비교 열거하여 표로 나타내면 위의 <표 1>과 같다. <표1>을 통해서 살피건대, 일견해서 문익점의 관력과 관련된 “가전”의 기록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음이 발견된다. 우선 “실록”에 분명한 언급이 있는 “김해부사록” “순유박사” “좌정언” “전의주부” “좌사의대부”라는 다섯가지 관직 가운데, “좌정언” “좌사의대부”를 역임하였다는 것만 “가전”에 나타나고 “김해부사록” “순유박사” “전의주부”를 지낸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전”이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나타난 5종 관직 가운데 3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록”에는 그가 “순유박사”로서 “좌정언”에 승진되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가전”에는 “순유박사”의 관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반면에 좌정언에 앞서 “예문관직강”과 “승봉랑”의 벼슬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된 바, 그가 좌정언으로 승진하기 직전의 관직인 순유박사는 종7품직으로서 직강(종6품)이나 승봉랑(6품)보다 하위의 관직으로 나타나 가전의 이같은 기술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실록에는 목면 보급의 공적이 알려지면서 우왕 1년(1375)에 전의주부에 제배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의주부는 정6품직으로 앞서 원 사행시 관직인 좌정언과는 같은 직품의 벼슬이다. 그런데 가전에는 전의주부에 제배된 사실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공민왕 16년(1367) 중현대부예문관제학겸지제교, 공민왕 17년(1368)에 예문관제학겸성균관사성, 공민왕 22년(1373)에 중현대부좌대언우문관제학겸지제교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현대부는 종3품의 관계이고, 예문관 제학, 성균관 사성, 우문관 제학은 각각 정3품, 종3품, 정3품의 관직으로서, 그가 정6품직인 전의주부에 앞서서 이들 관직을 거쳤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록”과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在官(在京), 在鄕 시기는 뚜렷이 차이가 나타난다. 즉 “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이듬해인 갑진년 이래 전의주부로 다시 관도에 오른 시기까지의 기간(1364 - 1374)을 줄곧 고향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에, “가전”에는 1368년에서 1372년까지 대략 4년 동안과 1375에서 1388년까지 대략 13년 동안을 도중에 청도군수를 잠시 역임한 것을 제외하면 고향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가전”이 문익점의 증손에 의해 찬술된 것이라면 유명 선조인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서는 상세하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남겨야 한다고 하겠다.
“가전”의 관력에 관한 기술은 비록 상세한 점은 있으나 정확성에 분명히 문제가 발견됨으로 이 때문에도 “가전”이 과연 문치창의 찬술인지가 의문시 된다.

3) 元 使行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전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가 사행으로 元都에 간 시기와 그 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의하면, 그가 使行으로 元에 간 시기는 공민왕 12년(1363)으로, 당시 그는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원에 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실록』에는 이처럼 그가 원에 간 시기가 공민왕 12년이고, 또 그가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 자격으로 갔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지만, 후대에 기술된 그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에는 그가 원에 간 시기를 갑진년(1364)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하며 그가 어떤 사행단의 일원으로 원에 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명기한 경우는 그다지 찾아지지 않는다.
한편 『高麗史』의 문익점 열전에 따르면, 이 때의 사행에서 문익점은 원에 머물면서 德興君 측에 가담하였고 덕흥군이 패함으로 인하여 귀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원도에 머문 기간과 귀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그가 원으로 갈 무렵에 진행되고 있었던 공민왕의 폐위와 덕홍군 옹립 사건의 시간적 추이와 그리고 이즈음의 국내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것은 元 順帝 22년(1362) 12월이었다. 이 사실은 곧 바로 고려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은 이 전문을 접하자 朝臣들 가운데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吏部尙書 洪師範을 西北面體覈使로 삼아 진위 여부를 조사케 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강구하게 된다. 한편 당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해 있던 福州(安東) 행재소를 떠나 개경으로의 환도를 서둘러, 이듬해 공민왕 12년 1월에는 청주에 이르다. 2월에는 다시 청주를 출발하여 이 달에 개경 興王寺에 이르러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하례를 받고 이 곳을 임시 어궁으로 정한다.
贊成使 李公遂 일행을 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개경 환도 직후인 공민왕 12년 3월이었다. 이 때 이공수 일행의 사행은, 그 동안 홍건적의 난으로 불가피하게 복주(안동)에 까지 피난하게 된 사정을 원에 설명하고, 그로 인하여 그 사이 원 조정과의 정상적인 사절 왕래가 불가능하였던 사정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행이었다. “고려사”에는 이 때 이공수가 원에 올린 “陳情表”와 “賀平海盖賊表”의 두 종류 表文이 기록되어 있는바, 이 표문에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성 등을 호소하는 내용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당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실을 이미 전문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면상의 사행 목적 이외에 원도에서의 동정을 살피려는 의도가 수반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해 4월에 파견된 密直商議 洪淳, 同知營直司事 李壽林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앞서 이공수 일행과는 달리 공민왕의 폐위와 덕흥군의 고려 국왕 책봉에 항변하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진정할 목적을 띤 사절단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때의 사절단은 바로 전월 윤3월에 있었던 金鏞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파견된 사절단이기도 하였다.
소위 '與王寺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원제의 명에 내응한 고려 측 附元 세력의 준동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시해로까지 이어질 번했던 이때의 변란은 崔瑩 등 무장 세력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직후 공민왕이 원에 파견한 홍순 등의 사절단은 성격상 앞서 이공수 등의 사절단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즉 김용 일당이 타멸되면서 국내에는 더 이상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할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때의 사행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려는 원 조정의 처사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성격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때 원의 御史臺, 中書省, 詹事院 등에 百官 耆老의 뜻이라고 하여 보내진 항변서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의 폐위 결정은 元都에 있는 고려의 不逞한 무리들이 조장한 허망한 말을 따른 것이니 이들 흉도들을 강력히 처벌하여 報功去讒의 의지를 보여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였다.
문익점이 원도에 간 것이 『실록』에 나타난 대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 였다면 당시 그의 사행 목적은 개경 환도 이후 아직 “흥왕사의 변”이 있기에 앞서서, 그간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과의 외교적 교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정을 알리는 한편, 원 조정의 동정을 살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家傳」에는 문익점이 계묘년(1363)에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사실은 나타나고 있으나, 어떤 사절단의 일원으로 갔는지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家傳」의 내용 중에는 문익점이 원도에 있으면서 이공수를 찾아가 만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가 이공수를 수행해서 온 서장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가전”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 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이에 앞서 국가에 틈이 많았으니, 서로는 紅賊, 남으로는 왜구가 걱정거리였다. 또한 元朝로 부터 見責을 받아 앞서 원에 들어간 모든 사신이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또 봄이 다 가도록 正朔의 頒赦를 행하지 않았고 출국한 사신은 돌아오지를 않으니, 안팎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하고 두려워 마음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을 다시 보내어 사정을 아뢰어 원제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원으로 가는 것을 꺼려했으나 선생은 서장관으로 원나라로 갔다.

이 「家傳」의 내용에 의하면 그의 사행단은, 원에 들어간 많은 사신이 돌아오지 못하고, 또 봄이 다 가도록 매년 천자의 正朔 때 관례적으로 행하는 頒赦의 조칙마저 이르지 않아, 의심과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본국 사정을 알려 원제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의 사행이었다는 것이다.
“가전”에 기술된 사행 배경과 사행 시점은 흡사 그가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가 아니라 홍순, 이수림 등의 사행단의 일원으로 원도에 간 듯이 보이기도 한다. 흥순, 이수림 일행이 원의 御史臺나 中書省 등에 올린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小邦이 賊을 평정하고 길을 통한 뒤에 獻捷 賀正 謝恩 賀聖節 등의 使者가 서로 이어졌으나 아직 한 사람도 본국으로 돌아온 자가 없고, 또 봄이 다 가는데도 正朔의 頒賜가 없고 출국한 사신이 이르지 않으니..."라고 하는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이는 가전에 기술되어 있는 위 인용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익점이 홍순, 이수림과 동행하여 원에 간 경우라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원도에 체류하면서 원에 억류되어 덕흥군을 만난다거나, 우여곡절을 겪어 3년간 체류를 한다거나 하는 상황을 맞을 까닭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공수의 경우 일시 원에 억류되는 상황을 맞기도 하고, 실제로 원으로부터 태상경, 우정승 등의 벼슬을 제수받아 덕흥군 측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지기도하여 고려 조정으로부터 일시 파직당한 일이 있기도 하였으나, 홍순과 이계림 등은 사행과 관련해서 덕흥군 사건에 직접 연루됨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가전”에 기술된 문익점의 사행 시점과 사행 배경에 대한 설명은 “태조실록”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라고 하는 내용에도 부합되지 않고, 고려사에 기술된 것처럼 “사신을 받들고 원에 감으로 인하여 머물면서 덕흥군에 붙었다(奉使如元 因留附德興君)"라고 하는 내용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점에서 가전에 기술된 원으로 간 사행 시점과 사행 배경에 대한 설명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이 간취되는 것이다.

4) 在元 行跡

가전은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이 가운데 그의 재원시 행적과 관련하여 『고려사』나 『실록』의 기사와 상충되는 부분이 바로 그가 귀국한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문익점의 귀국 시기는 재원시 행적과 체류 기간 등에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家傳」에 기술된 그의 재원시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익점은 처음 원에 도착한 뒤 禮部侍郎이란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元帝가 이미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명한 시기였으므로 元都에 이른 사신들은 대부분 덕흥군으로부터 僞書와 僞官 등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위서나 위관은 덕흥군 측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덕흥군 즉위 후의 관직 보장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자신의 이름을 趙可達이라고 하는 자가 그를 찾아와 은근히 유혹했으나 이를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이공수를 만날 일이 있어 그에게 물어보니 그가 이 때 만났던 조가달이라는 자가 바로 덕흥군 이었다고 한다.
그가 덕흥군의 제의를 거절하자 다음에는 원제가 황제의 위세로서 덕흥군을 따를 것을 직접 종용하였는데, 이 또한 문익점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시 원제가 강압적으로 덕흥군에 가담토록 종용한 것에 대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 두 군주가 없다"는 말로 즉각 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문익점의 충절을 드러낼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때 문익점은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42일 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구류를 당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 역신 崔濡는 그가 덕흥군 측에 붙었다는 헛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원제가, 덕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회유하기 위해 구류에서 풀어 다시 일을 보게 하자 그는 僞書와 認帖 및 誘書 수십여 장을 불에 태우는 등 元帝의 명을 거역하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서 이해 11월에 교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유배지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1364) 2월이었고, 병오년(1366) 9월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가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 원근에서 사람들이 샘물을 길어 가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 귀양살이 중에 達成貴라는 고상한 사람과 상종하여 雲南 지방의 풍물을 많이 알게 되어 손수 『雲南風土集』이라는 책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목면씨를 얻게 되는 것은 이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 원도로 귀환하는 도중 밭 가운데 핀 목면화를 보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다음 해(1367) 정월에 그가 元都에 이르자 원제는 그를 다시 예부시랑 어사대부에 임명하였으나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올라 2월에 송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곧바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家傳」에 따르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鄭天益과 함께 목면 종자를 심게 되는 것은 정미년(1397) 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해를 갑진년이라고 명기하고 있고, 고려사 열전에는 "덕흥군이 패하자 귀국하였다"라고 하여 역시 갑진년에 귀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鮮初의 官撰 史書에 나타난 그의 귀국 연대는 가전에 기술된 귀국 시기와 3년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근래의 학술적 연구는 그의 3년간 유배 생활을 의문시하고 그가 갑진년에 귀국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르면 그가 원에 가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은 나머지 목면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다소 극적인 그의 행적은 자동적으로 부인되며, 또 이와 관련해서 고려사에 기술된 "奉使如元 因留附德與君"이라는 재원 시 행적이 기정사실화 될 개연성이 크다. 이 경우 목면 종자의 취득 과정도 달리 설명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의 갑진년 귀국을 타당시하는 견해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목면이 이미 북경에 까지 보급되었고, 따라서 당시 목면 종자를 구하는 일은 강남 지역에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북경 근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전에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원에서의 3년간 유배 사실에 대해서는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서도 일찍이 이를 의문시 한 경우가 찾아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사후 불과 4년이 지난 태종 1년에 권근이 문익점의 장자 文中庸을 서용할 것을 상서하는 내용 가운데, "故간의대부 文益漸이 처음 강남으로 들어가 목면 종자 수매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그의 원에서의 체류 기간을 논외로 하면 일단 그가 元都를 떠나 강남으로 갔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 밖에 현전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과 세조 정축년(1457)의 賜墓祭文이 보이는 바, 여기에도 그의 南荒 유배 사실이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다음에서 보듯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에 언급되고 있는 문익점의 재원 시 행적은 문치창의 “가전”에 나타난 재원 행적과 정확히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네. 중국 諫院에서 僞書를 불에 태우고 말은 天潢을 움직이게 하였네. 귀양살이 3년을 하였지만 그 의로운 기운은 펄펄도 하였네.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는 고려 서울 개성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利를 끼쳐 우리 백성 옷 입혀 주었네.

위 제문은 그의 사후 불과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문익점의 공적을 집약적으로 기린 내용으로, 諫院에서 僞書을 불에 태우고 3년의 귀양살이를 했다는 내용은 문치창의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재원 행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가전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이 단지 후손가에 의해 어느 시기에 날조된 기록으로 가볍게 넘길 수 만은 없게한다.

4. 맺 음 말

본고는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撰한 『三憂堂實記』 所載의 「家傳」이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임을 확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시기 등, 그의 생애와 행적에서 주로 의문시되는 내용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본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文益漸이 남긴 遣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의 처음 발간 과정을 살펴보면 “가전”의 발견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현전 『삼우당실기』 연보의 내용은 가전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을 현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家傳」의 발견은 그 이전까지 잘못 알려졌거나 분명하지 않은 문익점의 행적을 많은 부분 바로 잡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 앞서 문익점의 행적을 輯錄한 『功行錄』을 살펴보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이 원에 사행한 시기나 목적, 그의 졸년 등이 잘못 기술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익점이 甲辰年에 正使 德興君의 副使로서 원에 갔던 것으로 기술하거나 그가 우왕 9년에 사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만큼, 가전의 발견 이전만 하더라도 문익점의 행적은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지만, 「가전」에 기술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내용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를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 등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의 출생 년도는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卒年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의 졸년은 한동안 우왕 9년(1383)으로 잘 못 알려져 신도비명이나 묘갈명 등에 그렇게 새겨지기도 하였고, 가전 발견 이후에는 정종 2년(1400)으로 또한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문익점이 정종 2년에 졸했다는 “가전”의 기록도 잘못된 것으로, “태조실록” 졸기에 나타난 대로 그가 사거한 시기는 태조 7년(1398)이었음이 사실로 확인된다.
가전의 기록이 官撰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家傳」은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 등 관찬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확인된다.
가전의 기록 내용 가운데는 문치창 자신의 추정이 개입됨으로서 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사실 관계를 잘못 기록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증조의 생애나 행적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 이를테면 생몰 연대라든지 사환 이력을 잘 못 기술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부분의 기록에 현저한 오류가 발견된다면 “가전”을 문치창이 지은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전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가전을 통해서 볼 때, 문익점의 사행은 시기적으로 보아 계묘년 3월의 이공수 일행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실제 기술된 내용에는 문익점이 그보다 앞서 원에 체류 중인 이공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가 이 해 4월에 파견된 洪淳, 李壽林 일행과 동행하여 원에 갔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홍순 등의 일행이 사행에 오른 시기는 덕흥군의 국내 측 내응 세력이 일망타진된 뒤였기 때문에 덕흥군 사건에 연루될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시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가전에 기술된 사행 시기와 사행단, 사행 목적 간에는 실록이나 고려사의 기록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발견된다.
가전은 문익점의 재원 3년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이나 태조실록에는 그가 사행으로 원에 들어간 이듬 해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어 가전에 기술된 재원 3년의 행적은 그 사실 여부가 의문시 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물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없이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전에서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를 통하여 줄곧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체류한 것은 일단 사실로 접근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그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삼우당실기에 문익점의 증손 문치창에 의해 찬술된 것으로 등재된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상세하고도 풍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이를 문치창의 찬술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전의 자료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 입수 경위도 석연치 않고, 1808년 발견 이래 현존 여부도 분명치 않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삼우당실기” 소재 “가전”은 문익점의 증손 문치창이 직접 찬술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 일부 내용은 생략하였으니, 원문을 보려면 [문익점과 목면업의 역사적 조명- 아세아문화사 2003.11.21 출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